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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그 쓸쓸한 영혼

너는 ’꽃‘ - 최 두석 시.

어디에나,,, 피워내라!








새벽 시내버스는
차창에 웬 찬란한 치장을 하고 달린다
엄동 혹한일수록
선연히 피는 성에꽃
어제 이 버스를 탔던
처녀 총각 아이 어른
미용사 외판원 파출부 실업자의
입김과 숨결이
간밤에 은밀히 만나 피워낸
번뜩이는 기막힌 아름다움
나는 무슨 전람회에 온 듯
자리를 옮겨 다니며 보고
다시 꽃이파리 하나, 섬세하고도
차가운 아름다움에 취한다
어느 누구의 막막한 한숨이던가
어떤 더운 가슴이 토해 낸 정열의 숨결이던가
일없이 정성스레 입김으로 손가락으로
성에꽃 한 잎 지우고
이마를 대고 본다
덜컹거리는 창에 어리는 푸석한 얼굴
오랫동안 함께 길을 걸었으나
지금은 면회마저 금지된 친구여.


- 최 두석 시 ‘성에꽃’ 모두




요즘에는 별미의 나물이지만
예전에는 섬사람들 목숨을 잇게 해서
명이라 부른다는
울릉도 산마늘잎 장아찌
밥에 얹어 먹으며 문득
세상에는 참 잎도 많고
입도 많다는 것 생각하네
세상의 곳곳에서
기고 걷고 뛰고 날며
혹은 헤엄치며
하염없이 오물거리는 입들
과연 잎 없이 입 벌릴 수 있을까 생각하네.


- 최 두석 시 ‘명이’
[투구꽃],창비, 2009.





나무마다 모양과
빛깔이 다른 단풍잎
우수수 날리는
산길을 걷는다

옛적 심마니들이
치성 드리는 데 썼다는
약수 한잔 마시러
굽이굽이 돌아가는
산길을 걷고 걷는다

폭포가 떨어지는
암벽에서 솟아
쏘는 맛이 각별한 샘물
심마니들은 왜
불바라기 물로 행운을 빌었을까

깊은 산중에 와
맨 처음 불바라기라 부른 이는
가슴속의 불
어떻게 다스렸을까 생각하며
산길을 걷고 걷고 걷는다.


- 최 두석 시 ‘ 불바라기 가는 길‘
[투구꽃],창비, 2009.





잎 하나에 꽃 하나
그 사이를 잇는 호리호리한 꽃대

꽃술에
이슬방울 잘 머금는
초가을 산들바람에 춤을 추는

눈으로만 보고
손으로 만져서는 안 되는 어여쁨이 있다

이제 막 풋풋한 소녀에서
청초한 처녀로 바뀌는
립스틱도 처음 발라보는

혼자서 몰래 좋아하고
손을 대서는 안 되는 아리따움이 있다.


- 최 두석 시 ‘물매화’
[두루미의 잠], 문학과지성사, 2023.




예전부터 능소화와 향나무는
양반집 정원에서 함께 자라던 나무
요즘도 향나무 곁에 능소화를 심어
능소화가 향나무를 감고 올라가 피우는 꽃
여름날의 아취로 즐기는 이 있다

남의 취향에 대한 왈가왈부는
세상의 어리석은 일에 해당되지만
능소화를 담장이 아니라
향나무 같은 생나무에 올려 피운 꽃 보면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진다

주렁주렁 매달려 나팔을 부는 꽃만 보이고
향나무를 감고 올라간 덩굴은 보이지 않는가
꽃다운 꽃 피우지 못하는 향나무는
화사하게 눈길 끄는 능소화에게
옥죄여 죽어도 좋단 말인가

다른 나무를 감고 올라가는 것은
능소화 같은 덩굴나무의 생태이니
조물주를 탓할 수밖에 없겠지마는
정원을 가꾸면서까지 신의 뜻을 시험해보는
원예의 취향에는 공감하기 힘들다


- 최 두석 시 ‘ 능소화와 향나무‘
* 숨살이꽃, 문학과지성사, 2018





둥구나무가 둥구나무인 것은
마을에 뿌리 내리고 살며
길 떠나는 이를 멀리 배웅하고
돌아오는 이를 먼저 반기기 때문이다

둥구나무는 누구든 가리지 않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를
팔 벌려 다정히 맞이한다
좀처럼 등을 돌리지 않는다

숲속의 팽나무나 느티나무는
둥구나무가 되지 못한다
오랜 세월 사람들과 함께 숨쉬며 살아야
그늘이 넓고 깊은 둥구나무가 된다


- 최 두석 시 ‘ 둥구나무‘
[숨살이꽃], 문학과지성사, 2018.





아무리 잘 물든 단풍나무라도
낱낱의 잎사귀를 들여다보면
흠 없는 잎은 없다
멀리서 보면 눈부시게 휘황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상처투성이다

하지만 구태여
가을날 잘 물든 단풍나무를 찾아
기대어 서는 것은
상처 많은 삶을 위로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중충하게 늙지 않기 위해서다

때 맞추어 잎 떨구지 못하고
얼어붙은 잎 잔뜩 매달고 있는 나무는
얼마나 추레한가.


- 최 두석 시 ‘ 단풍나무에 기대어‘
* 숨살이꽃, 문학과지성사, 2018





격정으로 출렁이는 파도보다
바위의 침묵이 그리운 날
우뚝 솟은 바위산을 오르네
암봉을 타며
바위의 침묵을 쪼아
연꽃 피워 부처를 미소 짓게 한
옛적 석공을 생각하네

바위의 완강한 침묵보다
파도의 출렁이는 말이 그리운 날
파도소리 거친 바다로 가네
알몸으로 파도를 맞으며
청아한 피리소리로
거친 파도 잠재워 세상을 화평케 한
옛적 악공을 생각하네

그러다가 지상의 방방곡곡
암반을 뚫고 해맑은 샘이 솟는 곳
시내가 흘러 유유히 강이 되는 곳
강이 흘러 바다와 뒤척이며 만나는 곳
성지인 듯 순례하네
세상의 온갖 목마름을 적시는
간절하게 귀한 말을 찾아.


- 최 두석 시 ‘ 어떤 시인‘
[숨살이꽃], 문학과지성사, 2018.




계절이 바뀌는 산등성이에서

단풍잎 응시하며 피는 꽃이 있다

지상의 마지막 시간 앞두고

청을 높여 우는 풀벌레 소리 따라

아련히 맑은 향내 풍기다가

낙엽과 함께 사라지는 꽃이 있다.


- 최 두석 시 ‘구절초’




넓고 두터운 잎으로 햇살을 듬뿍 받으며
꽃망울 터뜨리는 함박꽃나무 그늘 아래 앉아
다소 이른 더위를 식히는데
나무는 한창 좋은 계절을 주저없이 만끽하고 있다

함박꽃나무 그늘 아래 계곡물도 좋아
주인 잘못 만나 고생 많은 발을 씻는데
땅속 깊이 벋은 뿌리들은 신나게 수액을 길어 올리고
벙그러진 꽃송이는 맑고 깊은 향내 스스럼없이 뿜어낸다

생글생글 환히 웃는 꽃송이 보고
숨결에 생생히 스미는 꽃내음 맡으며 문득 돌이켜보니
아 나는 제대로 시원하게 함박웃음 한번 웃지 못하고
너무 많이 조심하고 웅크리며 살아왔구나.


- 최 두석 시 ‘함박꽃’
[숨살이꽃], 문학과지성사, 2018.




허기질 때 그만인 두부  한 모
도톰하게 썰어 양념장에 찍어먹다가
고소한 맛 음미하며 문득 묻는다
혀에 감기는 이 두부 한 모를 위해
얼마나 많은 콩꽃이 피었나
얼마나 많은 별이 닝닝대었나

너우너울 눈앞에 어른거리는 콩꽃
콩꽃을 떠올리며 다시 묻는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음식
내 일용할 양식을 위해 지상의 곳곳에서
얼마나 수많은 꽃들이 피어나나
얼마나 수많은 벌들이 닝닝대나.


- 최 두석 시 ‘ 살살이꽃‘
[숨살이꽃], 문학과지성사, 2018.




산길 가다가 좋은 꽃밭 만나면
살살이꽃이 어디에 숨어 있나
숨살이꽃이 어디에 숨어 있나
두리번거리는 버릇이 있다
마치 산삼 찾는 심마니처럼

깊은 산 희미한 산길 가다가
멧돼지 가족이 파헤쳐놓은 꽃밭 만나면
녀석들도 살살이꽃 혹은 숨살이꽃 찾아
밤중에 주둥이로
쟁기질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진으로는 찍을 수 없고
늙은 무녀의 목쉰 노래로
귓가에 맴돌며 피는 꽃
상처에 문지르면 살이 돋아 살살이꽃
가슴에 문지르면 숨이 트여 숨살이꽃

산길 가다가 그윽한 꽃내음 맡으면
향내가 숨결에 스미고
핏속에 번지는 느낌이 좋아
잠시나마 그 꽃을 두고 살살이꽃 혹은
숨살이꽃이라 여기기도 한다.


- 최 두석 시 ‘숨살이꽃’
[숨살이꽃], 문학과지성사, 2018.





자신의 몸 씻은 물 정화시켜
다시 마시는 법을 나면서부터 안다

온몸을 한장의 잎으로 만들어
수면 위로 펼치는 마술을 부린다

숨겨둔 꽃망울로 몸을 뚫어
꽃 피우는 공력과 경지를 보여준다

매일같이 물을 더럽히며 사는 내가
가시로 감싼 그 꽃을 훔쳐본다

뭍에서 사는 짐승의 심장에
늪에서 피는 꽃이 황홀하게 스민다.


- 최 두석 시 ‘가시연꽃’
[투구꽃 ],창비, 2009.





까치소리에 잠 깨어 마당에 나서니
대추나무에 까치 몇 마리 날아와
골붉은 대추알 쪼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갈색
단맛에 혀를 적시며 지저귀는
까치들의 유쾌한 식사 바라보며
나도 대추 한 알 물고 풋풋해지나니

아 우리들의 생활은 얼마나
시들고 푸석푸석하고 쭈글쭈글해졌나
딱딱하게 메마른 건조식품이나
깡통음식에 물린 아이들과 함께
대추나무 한 그루 심어두고
가을이면 후두둑 후두둑 대추를 따서
싱그러운 단맛을 맛봐야겠다.


- 최 두석 시 ‘ 까치와 대추’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 문학과지성사, 1998.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랑의 눈길과 손길을 거쳤던가
하지만 각별하게 따스했던 눈길과 손길마저
얼마나 까마득히 잊고 지냈던가
경주 남산 바위에 새긴
수더분한 모습의
관음보살을 보며 든 생각이다

우람하거나 정교한 조각이 아니라서
더욱 정겨운
보살이 쥐고 있는 정병은
천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무수한 이들이 어루만진 손길로 반질거린다
그 정병을 기울여 약물을 마시면
어떤 마음의 병도 나을 것 같다.


- 최 두석 시 ‘ 마애관음보살을 보며‘
[투구꽃] ,창비, 2009.




사노라면 겪게 되는 일로
애증이 엇갈릴 때
그리하여 문득 슬퍼질 때
한바탕 사랑싸움이라도 벌일 듯한
투구꽃의 도발적인 자태를 떠올린다

사노라면 약이 되면서 동시에
독이 되는 일 얼마나 많은가 궁리하며
머리가 아파올 때
입술이 얼얼하고 혀가 화끈거리는
투구꽃 뿌리를 씹기도 한다

조금식 먹으면 보약이지만
많이 넣어 끓이면 사약이 되는
예전에 임금이 신하를 죽일 때 썼다는
투구꽃 뿌리를 잘게 잘라 씹으며
세상에 어떤 사랑이 독이 되는지 생각한다

진보라의 진수라 할
아찔하게 아리따운 꽃빛을 내기 위해
뿌리는 독을 품는 것이라 짐작하며
목구멍에 계속 침을 삼키고
뜨거워지는 배를 움켜쥐기도 한다.


- 최 두석 시 ‘ 투구꽃‘
[투구꽃],창비, 2009.




노래는 심장에, 이야기는 뇌수에 박힌다
처용이 밤늦게 돌아와, 노래로써
아내를 범한 귀신을 꿇어 엎드리게 했다지만
막상 목청을 떼어내고 남은 가사는
베개에 떨어뜨린 머리카락 하나 건드리지 못한다
하지만 처용의 이야기는 살아 남아
새로운 노래와 풍속을 짓고 유전해 가리라
정간보는 오선지로 바뀌고
이제 아무도 시집에 악보를 그리지 않는다
노래하고 싶은 시인은 말 속에
은밀히 심장의 박동을 골라 넣는다
그러나 내 격정의 상처는 노래에 쉬이 덧나
다스리는 처방은 이야기일 뿐
이야기로 하필 시를 쓰며
뇌수와 심장이 가장 긴밀히 결합되길 바란다.


- 최 두석 시 ‘ 노래와 이야기‘
[대꽃], 문학과지성사, 1984



뿌리로 검은 바위 끌어안고
난바다 거센 파도 소리 삼키며
모진 바람에 고개 숙여
잔디처럼 바닥을 기다가도
꽃만은 그윽이 푸른 가을 하늘
마주 보며 피우누나

내가 아는 눈빛 맑은 여인
세상살이 온통 허무해져
바다에 몸을 던지러 왔다가
바다국화 꽃 피우는 모습 보고는
마음 다잡고 다시 삶의 자리로
돌아가게 됐다는구나.


- 최 두석 시 ‘ 마라도 바다국화‘
[ 꽃에게 길을 묻는다 / 문학과지성사 ]




간혹부러 찾는
수백년 묵은 느티나무 아래
민들레 꽃씨가
앙증맞게 낙하산을 펼치고
바람타고 나는걸 보며
나는 얼마나 느티나무를 열망하고
민들레에 소홀하였나 생각한다.
꿀벌의 겨울잠 깨우던 꽃이
연둣빛 느티나무 잎새 아래
어느새 꽃씨로 변해 날으는
민들레의 일생을 조망하며
사람이 사는데 과연
크고 우람한 일은 무엇이며
작고 가벼운 일은 무엇인가 찾아본다.
느티나무 그늘이 짙어지기 전에
재빨리 꽃 피우고 떠나는
민들레 꽃씨의 비상과
민들레 꽃 필때
짙은 그늘 드리우지 않는 느티나무를 보며
가벼운 미소가 무거운 고뇌와
함께 어울려 사는 모습을 떠올린다.


- 최 두석 시 ‘느티나무와 민들레‘
* 꽃에게 길을 묻는다<문학과 지성사>중-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

무슨 꽃인들 어떠리

그 꽃이 뿜어내는 빛깔과 향내에 취해

절로 웃음짓거나

저절로 노래하게 된다면



사람들 사이에 나비가 날 때

무슨 나비인들 어떠리

그 나비 춤추며 넘놀며 꿀을 빨 때

가슴에 맺힌 응어리

저절로 풀리게 된다면


- 최 두석 시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




찔레열매 보면 찔레꽃 떠오르네
절로 자라 피우는 아름다움이
얼마나 생생하며
얼마나 그윽한 향내 풍기는지 보이네
꽃향기의 축제가 열린
무르익은 봄날의
잉잉대는 음악소리가 들리고
너울거리는 춤사위가 보이네

찔레꽃 보면 찔레열매 떠오르네
서리 맞고 눈 맞으며
추위와 허기를 견디는 새들에게
기꺼이 양식이 되는
열매가 품고 있는 여문 씨앗이 보이고
까치 뱃속을 통과한 씨앗이
볕바른 언덕에서 움트는
찔레의 일생이 보이네.


- 최 두석 시 ‘찔레를 보면‘




쓸쓸한 이에게는
밝고 따스하게
울적한 이에게는
맑고 평온하게 웃는다는
서산 마애불을 보며
새삼 생각한다
속깊이 아름다운 웃음은
그냥 절로 생성되지 않는다고

생애를 걸고
암벽을 쪼아
미소를 새긴
백제 석공의
지극한 정성과 공력을 보며
되짚어 생각한다
속깊이 아름다운 웃음은
생애를 두고 가꾸어가는 것이라고

아름다운 미소가
세상을 구하리라 믿은
천사백 년 전 웃음의 신도여
그대의 신앙이
내 마음의 진창에
연꽃 한 송이 피우누나.


- 최 두석 시 ‘미소’




겨울 폭포가 흘리는
눈물 머금어보았는가
얼어붙은 마음에
어설픈 햇살 받으며
벙어리 눈물 흘리다가
다시 얼어붙고 마는
고드름으로 빼곡한 가슴 보았는가
함성으로 세차게 흘러
거침없이 융융한 강이 되고 싶은데
키 넘게 눈 덮인 첩첩산중에
굳센 얼음기둥 세우고서
숨죽인 채
겨울 폭포가 흘리는
눈물 삼켜보았는가.


- 최두석 시 ‘겨울폭포’
* 시집"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문학과지성사.1997.




** 최두석: 대학교수, 시인, 1956년 11월 23일, 전남 담양군.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 박사, 1982.08.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 석사. 2003.~한신대학교 인문대학 문예창작학과 교수. 2001.~2003. 한신대학교 문예창작대학원 원장. 1997 인문대학 한국문화학부 문예창작전공 부교수. 2007, 제2회 불교문예작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