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얕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 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 한 용운 시 ‘나룻배와 행인’
님은 갔읍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읍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읍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아갔읍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읍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읍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으로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 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 한 용운 시 ‘님의 침묵’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波紋)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녘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한용운시 '알 수 없어요'전문
당신은 두견화를 심으실 때에
‘꽃이 피거든 꽃싸움하자’고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꽃은 피어서 시들어 가는데
당신은 옛 맹세를 잊으시고 아니 오십니까.
나는 한 손에 붉은 꽃수염을 가지고
한 손에 흰 꽃수염을 가지고
꽃싸움을 하여서 이기는 것은 당신이라 하고,
지는 것은 내가 됩니다.
그러나 정말로 당신을 만나서 꽃싸움을 하게 되면,
나는 붉은 꽃수염을 가지고 당신은 흰 꽃수염을 가지게 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나에게 번번이 지십니다.
그것은 내가 이기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나에게 지기를 기뻐하는 까닭입니다.
번번이 이긴 나는 당신에게
우승의 상을 달라고 조르겠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방긋이 웃으며,
나의 뺨에 입맞추겠습니다.
꽃은 피어서 시들어 가는데
당신은 옛 맹세를 잊으시고 아니 오십니까.
- 한용운 시 ‘꽃싸움’ 1926,《님의침묵》
남들은 님을 생각한다지만
나는 님을 잊고자 하여요
잊고자 할수록 생각하기로
행여 잊힐까 하고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잊으려면 생각하고
생각하면 잊히지 아니하니
잊지도 말고 생각도 말아 볼까요.
잊든지 생각하든지 내버려 두어볼까요.
그러나 그리도 아니 되고
끊임없는 생각생각에 님뿐인데 어찌하여요.
구태여 잊으려면
잊을 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잠과 죽음뿐이기로
님 두고는 못하여요.
아아, 잊히지 않는 생각보다
잊고자 하는 그것이 더욱 괴롭습니다.
- 한 용운 시 ‘나는 잊고자’
* 시선집 [ 님의 침묵 ] 와이 앤 엠, 2020. P 19/20
떨어진 꽃이 힘없이 대지의 품에 안길 때
애처로운 남은 향기가 어디로 가는 줄을 나는 안다.
가는 바람이 작은 풀과 속삭이는 곳으로 가는 줄을 안다.
떨어진 꽃이 굴러서 알지 못하는 집의 울타리 사이로 들어갈 때에
쇠잔한 붉은 빛이 어디로 가는 줄을 나는 안다.
부끄러움 많고 새암 많고 미소 많은
처녀의 입술로 들어가는 것을 안다.
떨어진 꽃이 날려서 작은 언덕을 넘어갈 때에
가없은 그림자가 어디로 가는 줄을 나는 안다.
봄을 빼앗아 가는 아가의 발밑으로 사라지는 줄을 안다.
- 한 용운 시 ‘ 낙 화 (落 花)‘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만을 사랑하지만은
당신은 나의 백발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만은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만을 사랑하지만은
당신은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 한 용운 시 ‘사랑하는 까닭’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
마찌니의 님은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니라.
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자유에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않느냐.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 저문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양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
- 한 용운 ‘군말’
* [님의 침묵], 열린책들, 2022.
나는 당신의 옷을 다 지어 놓았읍니다.
심의도 짓고 도포도 짓고 자리옷도 지었읍니다.
짓지 아니한 것은 작은 주머니에 수놓은 것뿐 입니다.
그 주머니에 나의 손때가 많이 묻었읍니다.
짓다가 놓아 두고 짓다가 놓아 두고 한 까닭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바느질 솜씨가 없는 줄로 알지마는,
그러한 비밀은 나밖에는 아는 사람이 없읍니다.
나의 마음이 아프고 쓰린 때에 주머니에 수를 놓으랴면,
나의 마음은 수놓은 금실을 따라서 바늘 구녕으로 들어가고,
주머니 속에서 맑은 노래가 나와서 나의 마음이 됩니다.
그리고 아직 이 세상에는 그 주머니에
널 만한 무슨 보물이 없읍니다.
이 작은 주머니는 짓기 싫어서 짓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짓고 싶어서 다 짓지 않은 것입니다.
- 한 용운 시 ‘ 繡수의 비밀‘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하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 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 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 한 용운 시 ‘복종(服從)‘
당신과 나와 이별한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가령 우리가 좋을 대로 말하는 것과 같이,
거짓 이별이라 할지라도 나의 입술이
당신의 입술에 닿지 못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 거짓 이별은 언제나 우리에게서 떠날 것인가요.
한해 두해 가는 것이 얼마 아니 된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시들어가는 두 볼의 逃花가
무정한 봄바람에 몇 번이나 스쳐서 낙화가 될까요.
회색이 되어가는 두 귀 밑의 푸른 구름이,
쪼이는 가을 볕에 얼마나 바래서 白雪이 될까요.
머리는 희어가도 마음은 붉어갑니다.
피는 식어가도 눈물은 더워갑니다.
사랑의 언덕엔 사태가 나도
희망의 바다엔 물결이 뛰놀아요.
이른바 거짓 이별이 언제든지
우리에게서 떠날 줄만은 알아요.
그러나 한 손으로 이별을 가지고 가는 날(日)은
또 한 손으로 죽음을 가지고 와요.
- 한 용운 시 ‘거짓 이별 ‘
님이여,
나의 마음을 가져가려거든
마음을 가진 나한지 가져가셔요.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님에게서 하나가 되게 하셔요.
그렇지 아니하거든
나에게 고통을 주지 마시고,
님의 마음을 다 주시오.
그리고 마음을 가진 님한지 나에게 주셔요.
그래서 님으로 하여금
나에게서 하나가 되게 하셔요.
그러면 나는 나의 마음을 가지고,
님의 주시는 고통을 사랑하겠습니다.
- 한 용운 시 ‘하나가 되어주세요‘
나는 어느 날 밤에 잠 없는 꿈을 꾸었습니다.
'나의 님은 어데 있어요, 나는 님을 보러 가겄습니다.
님에게 가는 길을 가져다가 나에게 주셔요,
검이여, 너의 가려는 길은 너의 님이 오려는 길이다.
그 길을 가져다 너에게 주면, 너의 님은 올 수가 없다.'
'내가 가기만 하면, 님은 아니 와도 관계가 없습니다.'
'너의 님의 오려는 길을 너에게 갖다 주면 ,
너의 님은 다른 길로 오게 된다.
네가 간대도 너의 님을 만날 수가 없다.'
'그러면 그 길을 가져다가 나의 님에게 주셔요.'
'너의 님에게 주는 것이 너에게 주는 것과 같다.
사람마다 저의 길이 각각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찌하여야 이별한 님을 만나보겠습니까'
'네가 너를 가져다가 너의 가려는 길에 주어라.
그러하고 쉬지 말고 가거라.'
'그리할 마음은 있지마는,
그 길에는 고개도 많고 물도 많습니다. 갈 수가 없습니다.'
검은 '그러면 너의 님을 가슴에 안겨주마.'하고
나의 님을 나에게 안겨주었습니다.
나는 나의 님을 힘껏 껴안았습니다.
나의 팔이 나의 가슴을 아프도록 다칠 때에,
나의 두 팔에 베여진 허공은
나의 팔을 뒤에 두고 이어졌습니다.
- 한 용운 ‘잠 없는 꿈‘
나는 서투른 화가(畵家)여요
잠 아니 오는 잠자리에 누워서 손가락을 가슴에 대고
당신의 코와 입과 두 볼에 샘 파지는 것까지 그렸습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작은 웃음이 떠도는
당신의 눈자위는 그리다가 백 번이나 지웠습니다
나는 파겁 못한 성악가(聲樂家)여요
이웃 사람도 돌아가고 버러지 소리도 끊쳤는데
당신의 가르쳐 주시던 노래를 부르려다가
조는 고양이가 부끄러워서 부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가는 바람이 문풍지를 스칠 때에
가만히 합창하였습니다
나는 서정시인이 되기에는 너무도 소질이 없나봐요
"즐거움"이니 "슬픔"이니 "사랑"이니
그런 것은 쓰기 싫어요
당신의 얼굴과 소리와 걸음걸이와를
그대로 쓰고 싶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집과 침대가
꽃밭에 있는 작은 돌도 쓰겠습니다
- 한 용운 시 ‘예술가’
당신은 해당화 피기 전에 오신다고 하였습니다.
봄은 벌써 늦었습니다.
봄이 오기 전에는 어서 오기를 바랐더니
봄이 오고 보니 너무 일찍 왔나 두려합니다.
철모르는 아이들은 뒷동산에
해당화가 피었다고 다투어 말하기로
듣고도 못 들은 체 하였더니
야속한 봄바람은 나는 꽃을 불어서
경대 위에 놓입니다그려.
시름없이 꽃을 주워서 입술에 대고
"너는 언제 피었니"하고 물었습니다.
꽃은 말도 없이 나의 눈물에 비쳐서
둘도 되고 셋도 됩니다.
- 한용운 시 ‘해당화’
님이여, 당신은 백번이나 단련한 금결입니다.
뽕나무 뿌리가 산호가 되도록 천국의 사랑을 받읍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엤 오동의 숨은 소리여.
님이여, 당신은 의(義)가 무거웁고
황금이 가벼운 것을 잘 아십니다.
거지의 거친 밭에 복의 씨를 뿌리옵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옛 오동의 숨은 소리여.
님이여, 당신은 봄과 광명과 평화를 좋아하십니다.
약자의 가슴에 눈물을 뿌리는 자비의 보살이 되옵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얼음 바다의 봄바람이여.
- 한 용운 시 ‘찬송’
선(禪)은 선(禪)이라고 하면 선(禪)이 아니다. 그러나 선(禪)이라고 하는 것을 떠나서 별로히 선(禪)이 없는 것이다. 선(禪)이면서 선(禪)이 아니요. 선(禪)이 아니면서 선(禪)인 것이 이른바 선(禪)이다.
......달빛이냐?
갈꽃이냐?
흰모래 위에 갈매기냐?
- 한 용운 ‘尋牛莊 2 (심우장2)‘
나는 소나무 아래서 놀다가
지팡이로 한줄기 풀을 무찔렀다.
풀은 아무 반항도 원망도 없다.
나는 무러진 풀을 슬퍼한다
무러진 풀은 영원히 이어지지 못한다.
내가 지팡이로 무질지 아니하였으면
풀은 맑은 바람에 춤도 추고 노래도 하며
은(銀) 같은 이슬에 잠자코 키스도 하리라.
나로 말미암아 꺽어진 풀을 슬퍼한다.
사람은 사람의 죽음을 슬퍼한다.
인인지사(仁人志士) 영웅호걸의 죽음을 더 슬퍼한다.
나는 죽으면서도 아무 반항도 원망도 없는 한줄기 풀을 슬퍼한다.
- 한 용운 시 ‘莖 草(경초)‘
사랑하는 사람 앞에선 사랑한단 말을 못합니다.
아니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 사랑의 진리입니다.
잊어버려야 하겠다는 말은 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정말 잊고 싶을 땐 아무 말이 없습니다.
헤어질 때 돌아보지 않는 것은
너무나 헤어지기가 싫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같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웃는 것은
그만큼 그 사람과 행복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감정은 이별의 시점입니다.
떠날 때 울면 잊지 못한다는 증거요
뛰다가 가로등에 기대어 울면
오로지 당신만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함께 있을 수 없음을 슬퍼말고,
잠시라도 같이 있을 수 있음에 기뻐하고,
더 좋아해 주지 않음을 노여워 말고,
나만 애태운다고 원망하지 않고,
애처롭기까지한 사랑을 할 수 있음을 감사하고,
주기만 하는 사랑에 지치지 말고,
더 많이 줄 수 없음에 아파하고,
남과 함께 할 즐거움을 질투하지 말고,
그의 기쁨이라 여겨 함께 기뻐할 줄 알고,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 일찍 포기하지 않고,
깨끗한 사랑으로 오래 간직할 수 있는 나는
당신을 그렇게 사랑하렵니다.
- 한 용운 ‘인연설‘
꽃은 떨어지는 향기가 아름답습니다.
해는 지는 빛이 곱습니다
노래는 목마친 가락이 묘합니다.
님은 떠날 때의 얼굴이 더욱 어여쁩니다.
떠나신 뒤에 나의 환상의 눈이 비치는
님의 얼굴은 눈물이 없는 눈으로는
바라볼 수가 없을 만치 어여쁠 것입니다.
님의 떠날때의 어여쁜 얼굴을
나의 눈에 새기겄습니다.
님의 얼굴은 나를 울리기에는
너무도 야속한 듯하지마는,
님을 사랑하기 위하여는
나의 마음을 즐거웁게 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그 어여쁜 얼굴이
영원히 나의 눈을 떠난다면,
그때의 슬픔은
우는 것보다는 아프겄습니다.
- 한용운 ‘떠날 때의 님의 얼굴‘
나는 당신의 눈썹이 검고,
귀가 갸름한 것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마음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당신이 사과를 따서 나를 주려고,
크고 붉은 사과를 따로 쌀 때에,
당신의 마음이 그 사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나는 당신의 둥근 배와 잔나비 같은 허리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마음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당신이 나의 사진과 어떤 여자의 사진을 같이 들고 볼때에,
당신의 마음이 두 사진의 사이에서
초록빛이 되는 것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나는 당신의 발톱이 희고,
발꿈치가 둥근 것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마음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당신이 떠나시려고,
나의 큰 보석반지를 주머니에 넣실때에,
당신의 마음이 보석반지 너머로 얼굴을
가리고 숨는 것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 한용운 ‘당신의 마음‘
하늘의 푸른 빛과 같이 깨끗한 죽음은
군동(群動)을 淨化합니다
허무의 빛인고요한 밤은 대지에 군림하였습니다
힘없는 촛불 아래에 사리뜨리고
외로이 누워 있는 오오 님이여.
눈물의 바다에 꽃배를 띄웠습니다.
꽃배는 님을 싣고 소리도 없이 가라앉았습니다.
나는 슬픔의 三味에 「我空」이 되었습니다
꽃향기의 무르녹은 안개에 취하여
청춘의 황야에 비틀걸음치는 미인이여.
죽음을 기러기 털보다도 가벼움에 여기고,
가슴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얼음처럼 마시는 사랑의 狂人이여.
아아 사랑에 병들어,
자기의 사랑에게 자살을 권고하는
사랑의 실패자여.
그대는 만족한 사랑을 받기 위하여
나의 팔에 안겨요.
나의 팔은 그대의 사랑의 분신인 줄을
그대는 왜 모르셔요.
- 한용운 ‘슬픔의 삼미(三味)‘
아아 사람은 약한 것이다, 여린 것이다. 간사한 것이다.
이 세상에는 진정한 사랑의 이별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죽음으로 사랑을 바꾸는 님과 님에게야, 무슨 이별이 있으랴. 이별의 눈물은 물거품의 꽃이요,도금한 금방울이다.
칼로 베인 이별의 '「키스」가 어데 있는냐.생명의 꽃으로 빚은 이별의 杜鵑酒(두견주)가 어데있는냐. 피의 紅寶石(홍보석)으로 만든 이별의 기념반지가 어데있느냐. 이별의 눈물은 저주의 摩尼珠(마니주)요, 거짓의 수정이다.
사랑의 이별은 이별의 반면에, 반드시 이별하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이 있는 것이다. 혹은 직접의 사랑은 아닐지라도, 간접의 사랑이라도 있는것이다. 다시말하면, 이별하는 애인보다 자기를 더사랑하는 것이다. 만일 애인을 자기의 생명보다 더 사랑한면, 무궁의 회전하는 시간의 수레바퀴에 이끼가 끼도록 사랑의이별은 없는 것이다.
아니다 아니다.
「참」보다는 참인 님의사랑엔 죽음보다도 이별이 휠씬 위대하다. 죽음이 한방울의 찬 이슬이라면, 이별은 일천줄기의 꽃비다. 죽음이 밝은 별이라면, 이별은 거룩한 태양이다.
생명보다 사랑하는 애인을 사랑하기 위하여는,
죽을 수가 없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을 위하여는,
괴롭게 사는 것이 죽음보다도 더 큰 희생이다.
이별은 사랑을 위하여 죽지 못하는
가장 큰 고통이요 보은이다.
애인은 이별보다 애인의 죽음을 더 슬퍼하는 까닭이다.
사랑은 붉은 촛불이나 푸른 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먼 마음을 서로 비치는 無形에도 있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애인을 죽음에서 잊지못하고,
이별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애인을 죽음에서 웃지못하고,
이별에서 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애인을 위하여는 이별의 원한을
죽음의 유쾌로 갚지 못하고,
슬픔의 고통으로 참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차마 죽지 못하고,
차마 이별하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는 것이다.
그러고 진정한 사랑은 곳이 없다.
진정한 사랑은 애인의 포옹만 사랑할 뿐 아니라,
애인의 이별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고 진정한 사랑은 때가 없다.
진정한 사랑은 間斷이 없어서 이별은 애인의 肉뿐이요,
사랑은 무궁이다.
아아 진정한 애인을 사랑함에는 죽음의 칼을 주는 것이요,
이별은 꽃을 주는 것이다.
아아 이별의 눈물은 진이요,선이요,미다.
아아 이별의 눈물은 석가요. 모세요. 잔다크다.
- 한용운 ‘이별’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당신의 행복을 사랑합니다.
나는 온 세상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행복을 사랑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정말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을 미워하겄습니다.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의 한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을 미워하는 고통도
나에게는 행복입니다.
만일 온 세상 사람이 당신을 미워한다면,
나는 그 사람을 얼마나 미워하겄씁니까.
만일 온 세상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지도 않고 미워하지도 않는다면,
그것은 나의 일생에 견딜 수 없는 불행입니다.
만일 온 세상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고자 하여
나를 미워한다면,
나의 행복은 더 클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나를 미워하는
원한의 두만강이 깊을수록,
나의 당신을 사랑하는
행복의 백두산이 높아지는 까닭입니다.
- 한 용운 ‘행복’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사랑한다는 말을 안 합니다
아니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 사랑의 진실입니다
잊어버려야 하겠다는 말은
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정말 잊고 싶을 때는 말이 없습니다
헤어질 때 돌아보지 않는 것은
너무 헤어지기 싫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같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웃는 것은
그만큼 행복하다는 말입니다
떠날 때 울면 잊지 못하는 증거요
뛰다가 가로등에 기대어 울면
오로지 당신만을 사랑한다는 증거입니다
잠시라도 같이 있음은 기뻐하고
애처롭기까지 만한 사랑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주기만 하는 사랑이라 지치지 말고
더 많이 줄 수 없음을 아파하고
남과 함께 즐거워한다고 질투하지 않고
그의 기쁨이라 여겨 함께 기뻐할 줄 알고
깨끗한 사랑으로 오래 기억할 수 있는
나 당신을 그렇게 사랑합니다.
- 한용운 ‘나 당신을 그렇게 사랑합니다‘
벗이여, 나의 벗이여. 애인의 무덤 위에 피어 있는
꽃처럼 나를 울리는 벗이여.
작은 새의 자취도 없는 사막의 밤에 문득 만난 님처럼
나를 기쁘게 하는 벗이여.
그대는 옛 무덤을 깨치고 하늘까지 사무치는
백골(白骨)의 향기입니다.
그대는 화환을 만들려고 떨어진 꽃을 줍다가 다른
가지에 걸려서 주운꽃을 헤치고 부르는
절망인 희망의 노래입니다.
벗이여, 깨어진 사랑에 우는 벗이여.
눈물의 능히 떨어진 꽃을
옛 가지에 도로 피게 할 수는 없습니다.
눈물이 떨어진 꽃에 뿌리지 말고
꽃나무 밑의 티끌에 뿌리셔요.
벗이여, 나의 벗이여.
죽음의 향기가 아무리 좋다 하여도 백골의 입술에
입맞출 수는 없습니다.
그의 무덤을 황금의 노래로 그물치지 마셔요.
무덤 위에 피 묻은 깃대를 세우셔요.
그러나, 죽은 대지가 시인의 노래를 거쳐서
움직이는 것을 봄바람은 말합니다.
벗이여, 부끄럽습니다.
나는 그대의 노래를 들을 때에
어떻게 부끄럽고 떨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내가 나의 님을 떠나
홀로 그 노래를 듣는 까닭입니다.
- 한용운 ‘타고르의 시 ‘GARDENISTO를 읽고’
** 한용운: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한용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남.
1905년 설악산 백담사에서 승려로 입문
이후 불라디보스톡 일본 등을 여행하며 세계사의 큰 변화를 파악
1910년 한.일 불교동맹조약 체결을 분쇄
그후 만주에 망명하여 독립운동 지원
1914년 [불교대전]발간
1917년 정선강의 [채근담] 발간
1917년 12월 설악산 오세암에서 참선중 깨달음의 경지를 얻어 <오도송>을 남김
1918년 [유심지] 창간, 민중의 귀와 눈을 뜨게 함
1919년 3.1운동의 선봉에 서서 행동강령으로 공약상장을 첨가
옥중에서 독립선언서인 [조선 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를 발표
1923년 민립대학 설립운동
1924년 조선 불교 청년회 조직
1925년 설악산 오세암에서 [신현담 주해]와 사랑의 중도가 [님의 침묵]을 남김
1927년 신간회 발기
1933년 서울 성북동에 심우장이란 그의 생애 최초의 집을 지음
총독부를 마줍하기 싫다고 북향으로 집을 지어 더욱 유명
1935년 신문 연재소설 [혹풍] 발표
1936년 신문 연재소설 [후회] 발표
1938년 신문 연재소설 [박명] 발표
그외 수많은 논설문과 번역문, 수필 등을 발표
1944년 심우장에서 입적, 그의 나이 66세
- 글은 지조와 대쪽같은 정절로 민족 정기를 지킨 독립운동가인가 하면 불교의 대강백, 대선사로서의 승려였고, 사랑의 증도가를 노래하던 대시인이다. 그러면서 그는 사상가였다. 만해는 어느 것 하나에 집착해 있지 않으면서 이미 그 세계를 뛰어 넘어 있다. 그것은 무변이요, 단과 상을 여윈 자리에 다시 우뚝 솟아 중정의 도를 가르치고 잇다. 여기에 만해의 종교와 철학이 있다.
그 첫번째는 공사상이다. 현상과 본체의 관계를 직시하여 조건에 의한 실체의 파악일 뿐 실체는 없다는 정신이다. 아아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였습니다. 님은 가지도 오지도 않은 불거불래의 존재다. 이러한 반야의 공사상은 진리의 현상을 직시하여 이 역사속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가를 설명한다.
두 번째는 법신사상이다. 법신이란 수많은 개별적 존재들이 불가분리한 유기적인 통일성을 유지하면서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연기의 주체로 파악된다. 소설가, 독립운동가, 승려의 다양한 모습이 만해의 행동이며 철학이었다. 따라서 한용운의 님은 조죽이요, 붚타요, 연인이며, 그것
모두를 함축하기도 한 법신사상의 언어 형상화다.
세번째는 언행일치의 실천운동이다. 나보다는 너를 위한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정신이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이라는 시에서 너와 나의 관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님을 향한 대비원력의 정진력이 모든 대중을 살 리는 자유, 평등, 평화를 보장한다는 만해정신의 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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