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그 쓸쓸한 영혼 썸네일형 리스트형 너는 ’꽃‘ - 최 두석 시. 새벽 시내버스는 차창에 웬 찬란한 치장을 하고 달린다 엄동 혹한일수록 선연히 피는 성에꽃 어제 이 버스를 탔던 처녀 총각 아이 어른 미용사 외판원 파출부 실업자의 입김과 숨결이 간밤에 은밀히 만나 피워낸 번뜩이는 기막힌 아름다움 나는 무슨 전람회에 온 듯 자리를 옮겨 다니며 보고 다시 꽃이파리 하나, 섬세하고도 차가운 아름다움에 취한다 어느 누구의 막막한 한숨이던가 어떤 더운 가슴이 토해 낸 정열의 숨결이던가 일없이 정성스레 입김으로 손가락으로 성에꽃 한 잎 지우고 이마를 대고 본다 덜컹거리는 창에 어리는 푸석한 얼굴 오랫동안 함께 길을 걸었으나 지금은 면회마저 금지된 친구여. - 최 두석 시 ‘성에꽃’ 모두 요즘에는 별미의 나물이지만 예전에는 섬사람들 목숨을 잇게 해서 명이라 부른다는 울릉도 산마늘잎 .. 더보기 ‘존재’와 ‘투명’ 사이에서 - 천 양희 시 한밤중에 혼자 깨어 있으면 세상의 온도가 내려간다 간간이 늑골 사이로 추위가 몰려온다 등산도 하지 않고 땀 한번 안 흘리고 내 속에서 마주하는 한계령 바람 소리 다 불어버려 갈 곳이 없다 머물지도 떠나지도 못한다 언 몸 그대로 눈보라 속에 놓인다. - 천 양희 시 ‘한계’ [마음의 수수밭], 창작과비평사, 1994. 새소리 왁자지껄 숲을 깨운다 누워 있던 오솔길이 벌떡 일어서고 놀란 나무들이 가지를 반쯤 공중에 묻고 있다 언제 바람이 다녀가셨나 바위들이 짧게 흔들 한다 한계령이 어디쯤일까 나는 물끄러미 먼 데 산을 본다 먼 것이 있어야 살 수 있다고 누가 터무니없는 말을 했나 먼 것들은 안 돌아오는 길을 떠난 것이다 이제 떠나는 것도 떠나고 싶은 마음보다 흥미가 없다 내 한계에 내가 질렸다 어떤 생을 넘.. 더보기 ‘슬픈, 인간의 날개‘ - 천 상병 시. ―도끼가 내 목을 찍은 그 휠씬 전에 내 안에서 죽어간 즐거운 아기를 (장주네) 골목에서 골목으로 저기 조그만 주막집 할머니 한 잔 더 주세요. 저녁 어스름은 가난한 詩人의 보람인 것을…… . 흐리멍텅한 눈에 이 세상은 다만 순하디 순하기 마련인가 할머니 한 잔 더 주세요. 몽롱하다는 것은 장엄(莊嚴)하다. 골목 어귀에서 서툰 걸음인 양 밤은 깊어 가는데 할머니 등 뒤에 고향의 뒷산이 솟고 그 산에는 철도 아닌 한겨울의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그 산 너머 쓸쓸한 성황당 꼭대기, 그 꼭대기 위에서 함박눈을 맞으며, 아기들이 놀고 있다. 아기들은 매우 즐거운 모양이다. 한없이 즐거운 모양이다. - 천 상병 시 ‘주막에서’ [酒幕에서], 민음사,1979. 나는 술을 좋아하되 막걸리와 맥주박에 못 마.. 더보기 ‘보는 것’과 ‘시선’의 차이 / 조지훈 시.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밖에 성긴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켜야하리 꽃이 지는데 꽃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이 있을까 저어 하노니 꽃이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 조 지훈 시 ‘낙화‘ 무너진 성터 아래 오랜 세월을 풍설(風雪)에 깎여 온 바위가 있다. 아득히 손짓하며 구름이 떠 가는 언덕에 말없이 올라서서 한 줄기 바람에 조찰히 씻기우는 풍잎을 바라보며 나의 몸가짐도 또한 실오리 같은 바람결에 흔들리노라. 아 우리들 태초의 생명의 아름다운 분신으로 여기 태어나, 고달픈 얼굴을 마주 대고 나직이 웃으며 얘기하노니 때의 흐름이 조용히 물결치는 곳에 그윽이 피어오르는 한떨기 영혼이여. - 조 지훈 .. 더보기 ‘삶’의 변혁기, 자식에게,, 정 희성 시.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 정희성 시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아버지는 내가 법관이 되기를 원하셨고 가난으로 평생을 찌드신 어머니는 아들이 돈을 잘 벌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어쩌다 시에 눈이 뜨고 애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 나는 부모의 뜻과는 먼 길을 걸어왔다 나이 사십에도 궁티를 못 벗은 나를 살 붙이고 살아온 당신마저 비웃지만 서러운 것은 가난만이 아니다 우리들의 .. 더보기 ‘삶의 아픔과 나눔’ - 정 호승 시.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깍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길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 정 호승 시 ‘ 슬픔이 기쁨에게‘ 지는 저녁해를 바라보며.. 더보기 ‘생명’의 유기적 구상화 / 정 한모 시. 맑은 햇빛으로 반짝반짝 물들이며 가볍게 가을을 날으고 있는 나뭇잎, 그렇게 주고 받는 우리들의 반짝이는 미소로도 이 커다란 세계를 넉넉히 떠받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해 주십시오 흔들리는 종소리의 동그라미 속에서 엄마의 치마곁에 무릎을 꿇고 모아 쥔 아가의 작은 손아귀 안에 당신을 찾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살아가는 우리의 어제 오늘이 마침내 전설 속에 묻혀 버리는 해저 같은 그 날은 있을 수 없습니다 달에는 은도끼로 찍어 낼 계수나무가 박혀 있다는 할머니의 말씀이 영원히 아름다운 진리임을 오늘도 믿으며 살고 싶습니다 어렸을 적에 불같이 끓던 병석에서 한 없이 밑으로만 떨어져 가던 그토록 아득했던 추락과 그 속력으로 몇 번이고 까무라쳤던 그런 공포의 기억이 진리라는 이 무서운 진리로부터 우리들의 이 .. 더보기 ‘이미지’의 ‘모더니즘’/ 정 지용 시.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 산꽁이 알을 품고 뻐꾹이 제철에 울건만, 마음은 제고향 전하지 않고 머언 港口항구로 떠도는 구름. 오늘도 메끝에 홀로 오르니 한점 꽃이 인정스레 웃고, 어린 시절에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나고 메마른 입술에 쓰디 쓰다.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하늘만이 높푸르구나 - 정 지용 시 ‘ 故鄕 (고향 )‘ * [鄭芝溶全集정지용전집 1詩시 ]民音社민음사 1988.1.30 어저께도 홍시 하나. 오늘에도 홍시 하나. 까마귀야. 까마귀야. 우리 남게 왜 앉았나. 우리 오빠 오시걸랑. 맛뵐라구 남겨뒀다. 후락 딱 딱 훠이 훠이! - 정 지용 시 ‘홍시’ * 『향수』, 미래사(2001)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픈 마음 호수만 하니 눈감을 밖에. - .. 더보기 이전 1 2 3 4 5 6 7 8 ··· 1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