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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사는 이야기

22년, 끝자락에 읽는 고 명자 시인의 시,

<새벽 #3> '김환기' 화백



봄볕을 두드리다  /고명자

춘삼월 달력처럼 담벼락에 붙어
팬지나 선인장을 파는 남자가 있다
손바닥만한 화분을 이리저리 옮겨 놓으며
볕이 잘 드는 쪽으로 생을 옮겨보는 남자가 있다
흙 한 줌에 뿌리를 내리고
소꿉놀이 깊이 빠진 어설픈 중년
빳빳한 새 봄으로 거슬러 주기도 하면서
봄볕 만지작거리다 그냥 가도 뭐라 말하지 않는다
꽃 따위나 사랑을 하다가
햇살 등지고 앉아 깜박 졸던 사이였는지 모른다
유리창에는 매화를 뜯어 붙이고
모란 문양을 떠 가난을 땜질하면서
개다리소반에 김치찌개 한 냄비 소주 반 병
헐벗은 행복을 훌훌 떠먹다
난전의 꽃, 다행이다 그늘 한 뼘은 깔고 앉았다
등줄기 꼿꼿하던 꿈
몇 번의 내리막과 커브를 돌다 둥그러진 남자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다는 듯
국방색 어깨를 담벼락에 척 걸쳐 놓고서


양철별  /고명자

밤이면 쥐새끼처럼 양철 지붕에 올라가
녹슨 부위를 오려냈다
잠은 깎고 모서리는 날을 세워 별을 만들었다
어깨와 이마에 올려놓고
라디오에서 흐르는 각하의 목소리를 흉내냈다
뱉아놓은 낮달 같은 지붕 아래서
키보다 높은 산의 뒤편이나
누구의 심장에라도
단단하게 박히는 것
날아가 제일 먼저 반짝이는 것
겨울 지나 지붕 몇 개 사라졌지만
꿈도 지지리 크지 않던 동네 아이들
주머니 안에선 구겨진 별들만 찰랑거렸다
손가락을 베이면서
입술로 서로의 피를 핥아가면서
하루는 죽고 하루는 살았었다

너무 일찍 피 맛을 알아버린
나는 사자자리별
엄마가 문밖에 내다 버린 꿈을 찾아
죽을힘으로 바닥을 뒤지고 다녔다
높이 빛나리라는 믿음 저버릴 수 없어
시궁창 첨벙대는 우스꽝스런 별
날뛰다 넘어져 이마 찢어진 별
다 늙은 아이가 옥상에 앉아 하늘을 뒤진다
내 잠을 사과처럼 깎아 먹은 별들이 뜨겁다


양철 이불  /고명자

엄마는 다시 빳빳하게 풀을 먹였다
몸에서 오 센티쯤 뜬 이불 속에는
손톱으로 양철 긁는 소리가 났다

가난에도 각을 세워라
엄마의 지론이었다

밀가루 자루 뒤집어 탈탈 털면서
아무하고나 함부로 휘감기지 마라

양잿물에 광목 자루 팍팍 삶으면서
무릎 기운 바지를 입었으나 고개 꼿꼿이 세우고 다녀라

빨갛게 파랗게 광목 물들이면서
아무리 추워도 주머니에 손 넣고 걷지 마라

종잇장처럼 구겨진 오기 서릿발을 세웠다

수제비로 너를 키웠으나
가난한 바탕은 드러내지 마라

이불 밑은 얼음장이었다
빳빳한 광목 호청에 목이 쓸려
칼잠을 잤다, 꿈마저도 가위에 눌렸다
끌어안을 것이라곤 나밖에 없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무지개 골목  /고명자

누가 몰래 피워놓고 사라진 걸까요
몇 끼 굶은 얼굴처럼 핼쑥한 골목이에요
아름다운 빛깔은 독성이 강하다지요
밤이면 캄캄한 손 하나가 나를 끌고 다녀요
눈을 감아요 기꺼이 나를 맡겨요
두개골에서 분리된 눈알처럼 꽃송이만 굴러다녀요
선반 위에 올려놓고 싶은 옛집들
닿을 수 없는 거기로 돌아가 보고 싶은지
얼마나 상한 영혼이길래
침 한번 뱉고 머리카락 하나 뽑고 흙으로 덮은 다음
돌멩이로 꾹꾹 눌러두었던 걸까요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 위하여
내 방 유리창에 돌멩이를 던져버렸으니까
뒷짐 지고 옛집 담벼락인 양 기대면
길이 끊겨요 늦은 밤 소음처럼
삐뚤삐뚤 걸어온 날 만큼 낯익은 적막이에요
벌레 먹은 꽃의 파편
쨍그랑쨍그랑 동공에 박혀요
검은 무지개가 피어올라요
이젠 달려가지 않으니 비로소 슬퍼지는 어둠이에요


물끄러미  /고명자

잎 넓은 나무는 담장 안으로 들이지 않겠다
지나가는 바람을 불러들이지 않겠다

물기 마른 잎사귀의 탄식은
오래전 죽은 너의 메마른 입술
끝까지 들어주지 못한 말

물 얕은 잠속을 찰랑거리다
머리맡에 쏟아 붓는 흐느낌
우두커니 안장 세우는 밤이 많아
잎 다 지고도 한참 잠을 설친다

나보다 먼저 저무는 것 지켜보다가
발밑 가볍게 걷어차고
새처럼 훌쩍 올라앉고 싶은 생각
반음 낮은 허밍으로 따라 부르다
이 하늘에서 저하늘로 날아가고 싶은 생각

깨끗이 잊어버린 얼굴 덕분에
새잎이 날 때쯤 병색이 깊다

잎사귀는 새파랬다
손바닥 넷 합친 것보다 더 파란 슬픔이
병들어라, 병들어라
재즈처럼 운다

베어버리지도
뽑아버리지도 못하는
푸른 耳鳴을


술병들의 묘지  /고명자

기억을 떠올리려는 망자의 입술들이야 평생 어두운 쪽으로 기울던 아버지의 뒷모습처럼 바라만 봐도 취기가 올라 내 등에 업혀 이발소를 간 마지막 아버지 머리를 깎고 면도를 했지 칼도 먹히지 않는 늙은 낯가죽이라고 아가씨는 면상을 찌푸렸어 여기 와서 보니 죽음은 너무 반듯해 깍듯해 한번 핀 목숨이라면 영원을 피웠어야지 물고늘어질 것 하나쯤 남겨두었어야지 상석을 올리는 대리석 위로 네모 반듯한 팔월 태양, 나는 펄펄 끓고 말았어 한번도 꿇어 본 적 없는 내 무릎이 펴지질 않는 거야 과장된 슬픔이 뒤늦게 찾아 온 거야

저 많은 병나발은 누가 다 불었을까 산더미만큼 쌓인 빈 소주병의 아가리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 것 같은데 망자들의 땅에서는 도무지 자음모음이 잡히질 않는다 산사람은 하나도 보이질 않고 심심해진 망자 하나가 生을 재현해보다 낮술에 취해 우는 소린가 '술 한잔하세요' 죽음을 이룬 아버지가 무덤 속에서 껄껄 웃는 말, 저승으로 건너갈 수 있는 딱 한마디 이승의 말, 투명한 말씀을 공손히 따르고 빈 병은 버린다 영혼이 빠져나간 몸뚱이들은 여기 공원묘지에 버려진다


다비  /고명자

큰스님 불 들어가십니다  

스님 한 잠 주무신다 소나무 한 채 대나무 한 채 머리카락 한 채 흰 고무신 한 채 사대육신 오장육부 지글지글 태우신다 화엄을 이루신다

쑥쑥 밀어 넣으시게 佛이 잘 타야 하네
와 우노 성불하시는데
니도 함께 다비 시키주까
너매 아베타불 니미 아비타불
개안타, 시원하니 찜질하시는 중이라
치다 볼란께 고프다, 밥 묵고 오자
사리가 많이 나와야 할긴데
펑펑 소리나는 거 봉께 살을 잡숫는갑다
살아 있을 즉에 니도 내한테 잘해라
구름 맹쿠로 노리끼리 올라가는거 저거, 뭔주 아나

큰스님 佛 들어가십니다

바람부처 뜬구름부처 노을부처 있다가 없어지는 부처시라 근심부처 배부른부처 무일푼부처 웃는부처 심술부처 망나니부처 온 힘으로 깨어 있는 부처시라 죽음을 이루는 부처시라

쩌렁쩌렁 운다
생애가 色을 벗는다




*고명자(1958~ ): 시인, 서울 출생.
2005년 <시와 정신>에 등단
제1회 전국 계간지 작품상 수상
시집 <술병들의 묘지>(2013), <그 밖은 참, 심심한 봄날이라>(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