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인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 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에 먹을
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 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 1번지 채석장에 도로가서
금방 딴 돌 온기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서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새가 되었다.
- 김광섭 시 '성북동 비둘기' 모두
1968년 [월간문학] 11월호
서울 성북구 성북동 173-4호. 내 본적이다. 국민학교시절까지 서울에 있다가 중학교, 대학교는 각각 다른 가까운 지방에서 다녔다. 고교시절엔 성북동에서 가까운 삼선교에 숙소를 두고 새벽마다 신문을 들고 성북동 산동네를 오르 내리곤 했다. 고등학교는 근처의 H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그학교도 산비탈 높다란 정상에 위치해 있었다. 성북동이란 동네가 빈부의 차가 크게 자리한 동네 였는데,, 부촌의 경우엔 커다랗고 높다란 담벼락에 별장같은 정원수의 넓고 눈이부신 집들이 모여 있는가 하면, 정반대의 동네에는 허술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새벽부터 일거리를 찾아서 집을 나서는 서민들이 많이 모여 살고는 했다.
이곳에는 '대원각'이라는 당시엔 꽤 유명한 술집이 있었고,, 후에 '子夜'라 불리는 기생과 백석 시인과의 사랑의 결과로 '길상사'가 생겨 났으니,, 20대 초에 만난 그들은 백석은 시 쓰는 영어선생 이였고, 자야는 춤추고 노래하는 기생, 이들은 3년을 죽자사자 사랑한 후에 백석은 만주땅을 헤매다 북한에서 죽었고, 자야는 무진장 돈을 벌어 길상사에 시주했다. 1000억 재산을 시주 한 후에 후회가 없냐는 기자의 질문에 미소만 짓던,,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 하는데에 때가 있냐?" 던 "1000억이 그 사람의 시 한줄만 못하다" 하던 김영한(金英韓), 그녀가 생각나고,,, 그녀의 마음을 이끈 한 노스님이 생각난다.
어쩌다가.... 성북동에 들를때가 있었다. 친한 벗들이 길상사를 자주 찾는다고 하던데,, 나이 먹고서는 길상사에 가본적도 없다. 이제는 사람도 떠난 성북동에 너무도 변하여 낯설게 느껴지던 그곳에, 언제 또 가보려나?!... 3월에 쏳아지는 폭설을 보며 흔들리는 지하철속에서 그리움을 불러 보았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하는데,, 세상의 가진것들 다 내려놓고, 근심마저, 미련 마저도 다 내려놓고 떠날 수 있을까? 전철은 어두운 밤의 터널을 뚫고 날리는 눈을 헤치며 빛으로 길을 열어 나가는데,, 저 멀리 눈앞에 어둠이 소스라치며 뒷걸음쳐 사라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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