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사 처마끝 양철 물고기를 건드리는 눈송이 몇 점,
돌아보니 동편 규봉암으로 자욱하게 몰려가는 눈보라
눈보라는 한 사람을 단 한 사람으로만 있게 하고
눈발을 인 히말라야 소나무숲을 상봉으로 데려가 버린다
눈보라여, 오류 없이 깨닮음 없듯,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는 사람은 지금 후회하고 있는 사람이다
무등산 전경을 뿌옇게 좀먹는 저녁 눈보라여,
나는 벌 받으러 이 산에 들어왔다
이 세상을 빠져 나가는 눈보라, 눈보라
더 추운 데, 아주아주 추운 데를 나에게 남기고
이제는 괴로워하는 것도 저속하여
내 몸통을 뚫고 가는 바람 소리가 짐승 같구나
슬픔은 왜 독인가
희망은 어찌하여 광기인가
뺨 때리는 눈보라 속에서 흩어진 백만 대열을 그리는
나는 죄짓지 않으면 알 수 없는가
가면 뒤에 있는 길은 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앞에 꼭 한 길이 있었고, 벼랑으로 가는 길도 있음을
마침내 모든 길을 끊는 눈보라, 저녁 눈보라,
다시 처음부터 걸어오라, 말한다
-황지우 시 '눈보라'모두
---------------------------------------------------------------------------------------------------------------
-아이들의 곳추 선 어깨에 어리는 알수 없는 푸르른 슬픔....
-"아이들은 부모의 거울" 이라고 한다는데,,, 때로는 아이들의 표정이나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때 늦은 후회'를 할 때가 있다. 조금 더 저럴때는 용기를 복돋아 줄것을, 저 때에는 좀 더 엄하게 꾸짓어 바로 잡어 줄것을,, 하고 후회하는 때가 있는데,, 이는 아이들이 자라서 '자아'를 확고히 가지게 되면 '그 때' 부터는 아이들에게 어떤 칭찬이나 꾸짖음, 회유도 아이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고는 바꿀 수 없음을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다. 세월은 그 시대에 따라서 '공존하며 공감' 하는 것이있고, 세월에 따라서 변화하는 가치관이 존재하니,, 부모된 입장에서는 어떠한 시기에 '강제적' 관계에서 한걸음 더 딛어 '자율적'인 관계로 잘 진입하지 않으면 서로에게 '상처'를 주어 때로는 평생을 괴로워 하게 된다. 아이들이 사춘기이고 나름대로의 고민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수 없이, 아이들에게 심리적으로 물리적으로 '변화'를 주어야 할 때에는 괴롭고 마음이 아프지만,, 기도 할 수 밖에....
-나는 소위 고등교육을 받은 배운사람 이지만,, 때로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한 많은 세상사에서 더욱 더 커다란 배움을 받는다. 산다는 것이 교과서적 일 수는 없고,, 삶의 순간 순간에 무수한 변수와 순간의 선택이 자아내는 기회와 좌절,, 그리고 또 다시 시작될 수 밖에 없는 삶의 엄숙함. 많이 배웠으니까 뭐든지 더 잘하리라는 '어른'들의 기대감을 나는 잘 해내지는 못 한것 같다. 때로는 동물적인 감각이나 직관으로 삶을 살아왔고, 때로는 어찌할 수 없는 본능이나 광기에 제어하지 못한 내 행동은 내가 책임을 지며 살아왔다. '온전한 책임..' 그 무게와 쓰라린 아픔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냉정히 생각해 보면 세상은 차갑지도 따스하지도 않고,, 결국에는 내 삶의 깊이와 넓이 만큼 차가움도, 따스함도 돌아옴을 나는 몸으로 느낀다. 때로 세상은 '냉정하기'를 나에게 강요하고 주위의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과 방법으로 나에게 조언과 강요를 한다.
-결국에는 내 자신이 문제이며 해결책이며 답이다. 어느 스님이 "달을 가르키면 달을 봐야지 왜 손끝은 보는가?" 라고 했다던가? 세상의 일에는 가끔,, 핵심을, 삶의 원인을 바로 보지 못하여 빚어지는 오해들이 존재한다. 사람과 사람의 사이에는 '간격'이 있고, 그 '틈'을 메우며 사는 것이 인연이고 인생 이라는데,,, 나는 조금 더 세상적으로 배우고 깨닳아야 함을 안다, 지금의 이순간이 '내 자아'를 좀 더 강하고, 똑바로 잡는 순간 이기를 기원한다, 뼈 속 까지 아프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