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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거리

열독한 만화 - 히로카나 겐시/시마시리즈


25년간 만화 '시마 시리즈' 그린 저자 히로카네 겐시 인터뷰

"사장이 되려면 파벌보다 大義 따르고, 일에 충성해야"
MBA도 안 가르쳐주는 시마 사장의 성공학
일 만화 '시마 시리즈' 작가 히로카네 인터뷰

25년 간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샐러리맨'이었던 인물이 드디어 사장으로 승진했다. 지난 4월1일, 일본 아사히(朝日)신문이 석간 12면에 인사 특종 기사를 실었다. 얼굴 사진까지 집어 넣은 기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전자 대기업 하쓰시바(初芝)전산은, 고요(五洋)전기와 합병에 의해 곧 탄생할 '하쓰시바·고요 홀딩스'의 초대 사장에 시마 고사쿠(島耕作·60) 전무를 기용키로 방침을 굳혔다."

이 기사는 다음날 다른 신문들이 일제히 후속 보도함으로써 사실로 확인되고 일본 전역에 알려지게 됐다. 마이니치·요미우리·니혼게이자이 등 주요 신문이 시마 사장 내정자 기사를 약력까지 넣어 보도했다.

문제는 시마 고사쿠가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물론 하쓰시바전산 등도 존재하지 않는 가공의 기업이다. 아사히신문이 '만우절 기사'를 실은 것일까.

사실은 시마 고사쿠가 만화의 주인공이었다. 1983년 첫 등장 이후 3000만권이 팔린 베스트셀러 '시마 시리즈'의 주인공이 만화 속에서 사장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 소식에 흥분해 신문들이 기사로 쓸 만큼 시마는 일본에서 실존 인물 같은 대접을 받아왔다.

일본에서 시마는 샐러리맨의 우상이자, '수퍼 샐러리맨'으로 통한다. 그가 시련을 돌파하며 과장·부장·이사·상무·전무로 승진할 때마다 일본 샐러리맨들은 열광했다. '직장판(版) 신데렐라' 같은 시마의 성공담은 '샐러리맨의 로망' 그 자체였으며, '출세 본능'의 자극제였다. 하지만 그저 픽션의 재미 만은 아니다. 시마 시리즈는 직장인을 위한 실전 교본이자 정보서(書)이기도 하다. 직장 내 처세 노하우와 경영 화두(話頭), 시대를 꿰뚫는 정보력 덕분에 시마라는 인물이 생명력을 갖는 것이다. 시마는 경영학 교수나 자기 개발 전문가가 강의실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실전적 처세학을 보여준다.

높은 도덕률의 고고한 영웅을 기대했다면 시마에 실망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음모와 파벌투쟁이 암약하는 대기업의 현실세계 속에서 시마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면서 성공의 사다리를 밟아가는 처세의 극치를 보여준다. 일본의 샐러리맨들은 시마의 종횡무진 활약상에 열광하는 한편으로 절묘한 처세술을 배운다.

만국(萬國)의 샐러리맨은 고단하다. 살얼음판을 걷는 샐러리맨들에게 시마는 보편 타당하진 않지만 참고가 될 성공학 모델을 제시해준다. '시마 시리즈'의 작가 히로카네 겐시(弘兼憲史·61)씨를 인터뷰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시마 시리즈 저자 히로카네 겐시 / 도쿄 = 권철 프리랜서 사진작가

5월 28일 도쿄의 한 호텔에서 시마 고사쿠(島耕作)의 사장 취임 기자회견이 열렸다. 취재진이 몰리고 카메라 셔터가 터지는 가운데 시마 사장은 애니메이션 동영상을 통해 등장해 '싱크 글로벌(Think Global)'로 요약되는 비전을 밝히고 질문에도 답했다.

이날 기자회견 장면은 일본의 주요 TV가 저녁 뉴스 등에서 일제히 보도했다. 다음 날 시마 고사쿠의 만화 속 출생지인 이와쿠니(岩國)시에는 8m짜리 취임 축하 현수막이 내걸렸다. 한 유력 시사 주간지는 시마와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인 아소 다로 자민당 간사장의 가상 대담을 커버스토리로 게재하기도 했다. 외부인의 눈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종의 '소동'이었다.

25년간 시마 시리즈를 그려온 작가에게도 좀 의외였던 모양이다. 도쿄 하마마쓰초(浜松町)의 단골 카페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히로카네 겐시(弘兼憲史·61)씨는 "사람들이 거대한 조크(joke)를 즐기는 것 같다"고 했다.


■"위·아래 두루 평가받는 사람이 출세"


―일본 사회가 시마 사장 탄생에 흥분하고 있습니다.

"나라 전체가 거대한 조크를 즐기고 있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듭니다. 만화 속 주인공이 사장이 됐다는, 그저 조크 비슷한 얘깃거리일 뿐인데 TV가 뉴스로 다루기도 하고…. 그만큼 사람들이 샐러리맨의 성공 드라마를 열망하고 있다는 얘기겠지요."

―시마는 회사에 올인한 '회사 인간'이기 때문에 성공한 겁니까.

"아니죠. 그는 회사를 위해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일에 대해 충성하고 몸을 던집니다. 자기 실현을 위해 일을 하면 그것이 결과적으로 회사에도 도움이 되고 출세도 하는 겁니다. 회사에 휘둘린다면 말 그대로 월급쟁이로 끝나는 거지요. 요컨대 시마는 일에 모든 것을 건 '일 인간'이었기 때문에 성공했습니다."

―그는 입사할 때부터 사장이 되려는 야심이 있었습니까.

"어떤 자리에까지 오르겠다는 목표보다 그저 열심히 일했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사장이 된 겁니다. 야심이 지나치게 강하면 도리어 역효과가 날 수도 있지요. 시마가 출세한 것은 위쪽만 보지 않고 아래 쪽도 추슬러 가며 매순간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위·아래로부터 두루 평가를 받는 사람이 출세할 가능성도 높습니다."

만화의 무대인 '하쓰시바전산'은 일본을 대표하는 전자 메이커 마쓰시타전기를 모델로 한 것이다. 이 회사 내부에는 몇 개의 파벌이 존재해 일진일퇴의 투쟁을 거듭한다. 시마는 각 파벌로부터 자기편에 들어오라는 유혹을 받지만 거부하고 '한 마리 늑대'의 길을 선택한다.

―파벌 투쟁은 재미를 더하기 위한 픽션입니까? 아니면 정말 일본 기업들에 파벌이 광범위하게 존재하는지요.

"저는 기업에 있는 사람들을 직접 취재해서 실제로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만을 만화로 담습니다.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파벌은 많은 일본 기업들에 존재합니다. 중견기업 같은 곳에서 갑자기 사장 해임극이 터지기도 하는데, 물밑에서 파벌 투쟁이 벌어졌다는 얘기지요."

―파벌이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면 시마처럼 파벌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사장이 되기란 힘들지 않을까요.

"그런 측면이 있지요.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30년 전쯤 마쓰시타전기에서 사장을 10년이나 한 야마시타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파벌과 무관한 사람이었는데, 말단 이사에서 23명을 건너뛰고 일약 사장으로 발탁된 일이 있습니다. 마쓰시타 고노스케 회장이 그를 전격 지명한 것이죠. 얼마나 쇼킹한 일이었는지 '야마시타 건너뛰기'란 용어가 생길 정도였습니다."

23명을 건너 뛰어 사장으로 발탁된 야마시타의 사례는 시마 시리즈에도 나온다. 혼탁한 파벌 싸움에 발을 담그지 않았던 나카자와 이사가 시마의 도움을 받아 상무·전무·부사장의 단계를 건너 뛰고 사장에 오르는 극적인 드라마를 연출한 것이다.

―시마 고사쿠는 어떤 타입의 인간형입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조정형'이랄까요. 주변 의견들을 경청하면서 중지(衆智)를 모아 원만하게 조정해 나가되 최종적인 결정은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고 톱다운식으로 내리는 사람입니다. 일본 총리에 비유하면 아베 신타로 전 총리와 비슷한 타입이죠. 큰 그림을 그려내는 '비전형'이나 카리스마가 강한 '독재형'은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보면 '조정형'이 톱에 오르는 예가 더 많습니다."

―능력이나 업무 수완이 특출난 인물은 아닌 것으로 그려졌는데요.

"시마는 보통사람입니다. 특별히 머리가 좋은 것도, 개성이 강한 것도, 카리스마가 번득이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가 성공하고 출세할 수 있었던 것은 옳은 길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만화에서 파벌 싸움에 패배한 인물이 '실력만으로는 출세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유감이지만 사실이죠. 실력은 탁월한데도 중도에 꺾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실력은 뒤떨어지는데도 시운(時運)이 맞아 떨어져 쉽게 사장이 되는 사람도 있고, 부하 덕을 보는 보스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실력과 조건을 미리 준비해놓은 사람만이 그런 때가 왔을 때 낚아챌 수 있다는 점입니다. 요컨대 종합적인 능력이 필요한 겁니다."


■"여성에게 인기 있어야 출세한다"

시마 고사쿠에게 따라다니는 것 중 하나가 화려한 여성 편력이다. 시마의 주변엔 늘 여성들이 따라 다니며 어려운 처지에 처할 때마다 그를 도와준다. 엔터테인먼트 요소를 더하기 위한 만화적 설정이겠지만 이코노미스트지(誌)는 여성문제를 시마가 사장이 되기에 부적절한 이유 중 하나로 꼽기도 했다. 물론 시마는 이혼남이므로 여성 편력 자체가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여성들은 왜 그렇게 다들 시마를 좋아하면서 도와주려고 안달하는가요.

"잘생겼잖아요(웃음). 사실은 좀 기술적인 이유였어요. 애초부터 여성에게 인기 있는 캐릭터를 만들 생각은 아니었지요. 하지만 남자 쪽에서 손을 벌리면 시마는 플레이보이가 돼 버리지 않습니까. 그러니 여자 쪽에서 먼저 접근하도록 그릴 수밖에요. 시마는 일벌레라 여성관계를 즐기고 여성에게 빠져드는 타입은 아닙니다."

―시마는 여성에게 인기 있는 덕에 출세에도 도움을 받습니다만.

"나는 여성이 매력을 느끼는 남자라야 출세한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에게 인기가 없으면 남성에게도 인기가 없고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다는 얘기니까요. 인간으로서 매력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여성도 마찬가지지요. 이성(異性)에게 인기 없는 인물은 톱이 되지 못합니다."

―만화를 보면 시마는 술을 즐기는 반면 독서를 하는 장면은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책을 읽지 않아도 사장이 될 수 있나요.

"(웃으며) 아니죠, 그럴 리야…. 실제로는 시마도 독서를 많이 합니다. 책을 읽어야 시대 변화를 쫓아갈 수 있는 것은 당연하지요. 다만 책 읽는 장면을 만화로 처리하면 따분하니까 생략한 것일 뿐입니다."

―시마의 대사 중에 '남자는 지위가 올라가면 새로운 무대가 준비된다'는 명(名)대사가 나옵니다. 샐러리맨에게 출세란 무언가요.

"자기를 실현하는 것이죠. 하기야 요즘 (일본의) 젊은 세대들은 승진이나 출세를 별로 추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몸을 던져 일하기보다 개인적인 행복을 더 중시한다는 거죠. 헝그리정신이랄까, 도전정신이 약해져 가는 것 같습니다."

―무조건 대기업에 들어가겠다는 전통적인 생각도 바뀌는 것 같습니다. 일부에서는 대기업보다 벤처기업이나 창업을 더 선호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대기업의 까마득한 사다리를 차례로 밟고 올라가기보다 빨리 승부를 보겠다는 생각이겠지요. 그것도 좋습니다. 다만 대기업이 좋은 점은 플레이할 수 있는 무대가 크다는 것입니다. 대기업은 전 세계가 활동 무대가 되니까 그만큼 사람이 더 클 수 있지요."


■한국 제품이 일본에서 인기 없는 까닭


만화 중 시마가 사장 승진을 위한 직접적인 공덕을 쌓은 것은 삼성전자의 덕이었다. 그가 전무 시절 한국 삼성전자가 액정·전지에 강한 일본 고요전기(=샤프+산요전기)에 대해 적대적 M&A(인수·합병)를 시도한다. 여기에 하쓰시바(=마쓰시타)는 백기사(경영권 방어를 도와주는 세력)로 나서고 결국 고요전기를 인수하게 된다. 그 주역이 시마였다.

―삼성전자가 일본의 전자 회사를 M&A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있을 수 있습니까.

"가능합니다. 삼성전자는 시가총액이 9조엔에 달합니다. 반면 일본 메이커 중에서 가장 큰 마쓰시타라고 해보았자 5조4000억엔에 불과합니다. 샤프는 겨우 1조5000억엔입니다. 자본력으로 볼 때 삼성전자는 일본 메이커를 인수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거대해져 있습니다. 특히 샤프는 액정 분야에서 강한 기술력이 있어 삼성전자로서는 아마 속으로 욕심이 날 겁니다."

―만화 속에는 일본의 전자 메이커들이 서로 합쳐 한국에 대항하기 위한 통일 브랜드를 만들려는 움직임이 있는데.

"지금 일본에는 전자 메이커들이 너무 많습니다. 일본은 1억3000만 명의 구매력 있는 내수 시장을 갖고 있어 그만그만한 기업들이 그럭저럭 먹고살 수 있지만 세계 시장을 겨냥한다면 역시 더 커져야 합니다. 특히 한국 메이커와 경쟁하려면 일본을 대표하는 대형 브랜드를 만들지 않으면 안됩니다."

―일본에선 한국 제품에 대한 평가가 여전히 낮은 것 같습니다.

"현대자동차도 그렇고, 삼성의 전자제품도 그렇고, 전 세계 시장에서 그렇게 잘 팔리는 제품이 일본에서는 영 인기가 없지요. 과거 일본이 한국에 기술을 가르쳐주었고 기술은 아직 일본이 앞섰다는 의식이 강합니다."

―왜 그런가요.

"일본인은 이상한 사람들이라 한국 제품에 대해서는 '시민권'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미국의 매장에 가면 삼성·LG의 TV 제품이 맨 위에 있고 샤프는 그 밑에 진열돼 있습니다. 이런 현실을 일본의 기업들은 잘 인정하지 않으려 하지요. 나는 (일본) 기업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좀 더 세계를 바라보고 한국의 실력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고 주문하고는 합니다."

―일본식 경영보다 영·미식 자본주의가 각광받고 있습니다.

"주주의 이익을 위해 회사가 존재한다는 영·미식 철학은 어느 정도 맞습니다. 하지만 기업은 주주만의 것은 아닙니다. 종업원·거래처·지역사회 등 스테이크 홀더(이해관계자)도 중요하다는 일본식 자본주의의 이념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봅니다. 주주뿐 아니라 사회와 국가에도 공헌하는 기업, 바로 이것이 시마 시리즈가 그리는 이상적인 기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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