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와 사는 이야기

다시 읽는,, 나희덕 시인의 시 몇 편,

잭슨 폴록, 〈넘버 5〉, 캔버스에 유화 / 240×120cm





좋아하는 동사를 묻자 그는
흐르다,라고 대답했다
나도 그 동사가 마음에 들었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흐르다,가 흘러내리다,의 동의어라는 것을

그저 수평적 움직임이라고만 생각했다
몇 줄기 눈물이 볼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리기 전에는
실감하지 못했다 눈물의 수직성을

눈에서 입술로, 상류에서 하류로, 젊음에서 늙음으로, 살아있음에서 죽음으로, 높은 지대에서 낮은 지대로, 어제에서 오늘로, 그리고 내일로, 최초의 순간에서 점점 멀어지는 방식으로, 에너지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의 방향으로, 기억의 밀도가 높은 시간에서 낮은 시간으로

흐르는 모든 존재는
흐르는 동시에 내려가고 있다는 것을
자기도 모르게 아래로 아래로 떠밀려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라
흘러오르다,라는 말이 어디 있는가

고여 있거나
갇혀 있지 않는 한
쉴새없이 흘러내리는 물과 흙,
피와 눈물,
세포와 원소,
사랑과 우정,
또는 시간과 기억,

원치 않았지만 그것이 끝내 우리를 데려가 부려놓는 곳
어떤 하류의 퇴적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하지만 그때는 알지 못했다
흐르다,라는 동사는 더 이상 흐르지 못한다는 것을


- 나 희덕시 ‘흐르다’모두
*월간 『현대시』 2020년 9월호




누군가 나를 수놓다가 사라져 버렸다

씨앗들은 싹을 틔우지 않았고
꽃들은 오랜 목마름에도 시들지 않았다
파도는 일렁이나 넘쳐흐르지 않았고
구름은 더 가벼워지지도 무거워지지도 않았다

오래된 수틀 속에서
비단의 둘레를 댄 무명천에 압정에 박혀
팽팽하고 그 시간 속에서

녹슨 바늘을 집어라 실을 뀌어라
서른세 개의 압정에 박혀 나는 아직 팽팽하다

나를 처음으로 뚫고 지나가던 바늘끝,
이 씨앗과 꽃잎과 물결과 구름은
그 통증을 자금도 기억하고 있다 기다리고 있다

헝겊의 아편과 저편, 건너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언어들로 나를 완성해다오
오래 전 나를 수놓다가 사라진 이여



-나희덕 시 ‘오래된 수틀’ 모두




아버지, 당신의 틀니가
결국 당신보다 오래 살아남았어요

스물여덟개의 이빨은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캐스터네츠

그러나 무언가 씹을 때 들려오는 음악은
살아있다는 증거이기도 했지요

이제 당신은 자유로워지셨군요
헌 입천장과 잇몸을 짓누르던 재갈로부터
입속에 절벅거리던 침으로부터
누대에 걸쳐 이어져온 저작(咀嚼)의 노동으로부터
윗니와 아랫니로 직조한 삶의 태피스트리로부터

어느날 당신이 음식을 거부하기 시작했을 때
컵 속의 물에 잠긴 틀니는
제 소명을 다한 듯 고요해졌습니다

한자루의 초가 다 탄 뒤에
한 사람의 생이 다 지나간 뒤에
마침내 살과 밀랍이 녹아내린 자리에

빈 눈동자처럼 남아 있는
틀니와 촛대

당신을 가만히 내려놓은 틀니,
그 피 흘리지 않는 잇몸과 닳지 않는 이빨들은 말합니다

살아 있는 자,
씹고 씹고 또 씹어야 한다 씹어 삼켜야만 한다
자기만의 틀니에 이르기까지


- 나희덕 시 ‘자기만의 틀니에 이르기까지’모두




저 지붕 아래 제비집 너무도 작아
갓 태어난 새끼들만으로 가득 차고
어미는 둥지를 날개로 덮은 채 간신히 잠들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누가 박아 놓았을까요, 못 하나
그 못이 아니었다면
아비는 이디서 밤을 지냈을까요
못 위에 앉아 밤새 꾸벅거리는 제비를
눈이 뜨겁도록 올려다봅니다
종암동 버스 정류장, 흙바람은 불어오고
한 사내 가 아이 셋을 데리고 마중나온 모습
수많은 버스를 보내고 나서야
피곤에 지친 한 여자가 내리고, 그 창백함 때문에
반쪽 난 달빛은 또 얼마나 창백했던가요
아이들은 달려가 엄마의 옷자락을 잡고
제자리에 선 채 달빛을 좀 더 바라보던
사내의, 그 마음을 오늘 밤은 알 것도 같습니다
실업의 호주머니에서 만져지던
때묻은 호두알은 쉽게 깨어지지 않고
그럴듯한 집 한 채 짓는 대신
못 하나 위에서 견디는 것으로 살아온 아비,
거리에선 아직 흙바람이 몰려오나봐요
돌아오는 길 희미한 달빛은 그런대로
식구들의 손잡은 그림자를 만들어주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골목이 너무 좁았고
늘 한 걸음 늦게 따라오던 아버지의 그림자
그 꾸벅거림을 기억나게 하는
못 하나, 그 위의 잠


- 나희덕 시 ‘못 위의 잠’모두
*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창작과비평사, 2005(1994) .




버스가 달리는 동안 비는
사선이다
세상에 대한 어긋남을
이토록 경쾌하게 보여주는 유리창

어긋남이 멈추는 순간부터 비는
수직으로 흘러내린다
사선을 삼키면서
굵어지고 무거워지는 빗물
흘러내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더이상 흘러갈 곳이 없으면
빗물은 창틀에 고여 출렁거린다
출렁거리는 수평선
가끔은 엎질러지기도 하면서

빗물, 다시 사선이다
어둠이 그걸 받아 삼킨다
순간 사선 위에 깃드는
그 바람, 그 빛, 그 가벼움, 그 망설임

뛰어내리는 것들의 비애가 사선을 만든다


- 나희덕 시 ‘빗방울, 빗방울’모두
[어두워진다는 것], 창작과비평사, 2002.




뿌리뽑힌 줄도 모르고 나는
몇줌 흙을 아직 움켜쥐고 있었구나
자꾸만 목이 말라와
화사한 꽃까지 한무더기 피웠구나
그것이 스스로를 위한 弔花인 줄도 모르고

오늘밤 무슨 몰약처럼 밤비가 내려
시들어가는 몸을 씻어내리니
달게 와닿는 빗방울마다
너무 많은 소리들이 숨쉬고 있다

내 눈에서 흘러내린 붉은 진물이
낮은 흙 속에 스며들었으니
한 삼일은 눈을 뜨고 있을 수 있겠다

저기 웅크린 채 비를 맞는 까치는
무거워지는 날개만큼 말이 없는데
그가 다시 가벼워진 깃을 털고 날아갈 무렵이면
나도 꾸벅거리며 밤길을 걸어갈 수 있겠다

고맙다, 비야. ‥‥‥고맙다. ‥‥‥ 고맙다. ‥‥‥


- 나희덕 시 ‘몰약처럼 비는 내리고’모두
[어두워진다는 것], 창작과비평사, 2002.



당신은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막다른 기슭에서라도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무언가 끝나가고 있다고 느낄 때
산이나 개울이나 강이나 밭이나 수풀이나 섬에
다른 물과 흙이 섞여 들기 시작할 때

당신은
기슭에 다다른 당신은
발을 멈추고 구름에게라도 물었어야 했다
산을 내려오고 있는 산에게
길을 잃고 머뭇거리는 길에게 물었어야 했다

파도에 몸이 무작정 젖어드는 그곳을
우리는 기슭이라고 부르지

신이나 짐승과 마주치곤 하는 산기슭
포클레인이 모래를 퍼 올리고 있는 강기슭
풀벌레 날아다니는 수풀 기슭

기슭이라는 말에는 물기나 소리 같은 게 맺혀 있어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생겨난 비탈 끝에는
어떤 기슭이 기다리고 있는지

빛이 더 이상 빛을 비추지 못하게 되었을 때
마지막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을 때

그래도 당신은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모든 무서움의 시작 앞에 눈을 감지는 말았어야 했다


- 나희덕 시’기슭에 다다른 당신은’모두





한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
이제는 뿌리보다 줄기를 믿는 편이다

줄기보다는 가지를,
가지보다는 가지에 매달린 잎을,
잎보다는 하염없이 지는 꽃잎을 믿는 편이다

희박해진다는 것
언제라도 흩날릴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뿌리로부터 멀어질수록
가지 끝의 이파리가 위태롭게 파닥이고
당신에게로 가는 길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당신은 뿌리로부터 달아나는 데 얼마나 걸렸는지?

뿌리로부터 달아나려는 정신의 행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허공의 손을 잡고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다

뿌리 대신 뿔이라는 말은 어떤가

가늘고 뾰족해지는 감각의 촉수를 밀어올리면
감히 바람을 찢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무소의 뿔처럼 가벼워질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는 뿌리로부터 온 존재들,
그러나 뿌리로부터 부단히 도망치는 발걸음들

오늘의 일용할 잎과 꽃이
천천히 시들고 마침내 입을 다무는 시간

한때 나는 뿌리의 신도였지만
이미 허공에서 길을 잃어버린 지 오래된 사람


- 나희덕 시 ‘뿌리로 부터’ 모두
*시집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문학과 지성사 (2014.1)



* 아버지가 돌아 가시고 제법,, 오랜 시간뒤에 어머니가 돌아 가셨을 때, 입관시 에도,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시기로 결정을 했을 때, 서재에서 갑자기 오열하듯 터지던 눈물 뒤에,, 다시는 울지 않겠다. 했는데... 코로나로 인해 강제로 갖게된 시간의 여유 때문일까?!,, 새삼스럽게 아버지가 어머니가 가족들 모두의 존재가 하나, 하나씩 심장에 아프게 새삼, 새겨졌다.

살면서, 성장하며 지나왔던 장소들과 이웃과 친구들,, 스스로 ‘정리’해 왔던 모든 것들이 너무도 이상하게 세세하게 떠오르곤 한다. 상념이 가슴에 차 오를 때면 떠나곤 하던 길을 가지 못해서 인가? 끝없이 이어지던 길과 길을 통해서 흘려 보낼 수 있었던 일들이 가슴에 차고 넘쳐,, 눈이 옅게 쌓인 동네의 산책길을 새벽에 나서서... 조금은 낮섫은 동네 길 에서 다시 되 돌아 왔다.

[T'WAY AIR] 예약취소완료(번호:B6K8JK) 01/31 김포-제주 08:15, 02/01 제주-김포 19:55. 두달 전의 예약도 다시 취소하고, 그래도 허기에 에스프레스 한잔에 빵 몇 조각을 먹는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의문이지만,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그래야만 한다고 스스로에게 다짐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