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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사는 이야기

나희덕 시인.



   어두워 진다는 것/나희덕

 

     5시 44분의 방이
     5시 45분의 방에게
     누워 있는 나를 넘겨주는 것
     슬픈 집 한채를 들여다보듯
     몸을 비추던 햇살이
     불현듯 그 온기를 거두어가는 것
     멀리서 수원은사시나무 한 그루가 쓰러지고
     나무 껍질이 시들기 시작하는 것
     시든 손등이 더는 보이지 않게 되는 것
     5시 45분에서 기억은 멈추어 있고
     어둠은 더 깊어지지 않고
     아무도 쓰러진 나무를 거두어가지 않는 것
 
     그토록 오래 서 있었던 뼈와 살
     비로소 아프기 시작하고
     가만, 가만, 가만히
     금이 간 갈비뼈를 혼자 쓰다듬는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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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 나희덕의 시집 <어두워진다는 것> (창작과비평사, 2001)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소리를 낸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소리를 낸다. 소리란 때로 부정될 수 없는 존재의 증명이기도 하다. 나희덕의 네 번째 시집 『어두워진다는 것』(창작과비평사, 2001)은 인간과 자연 또는 사물의 세계가 이런 소리들을 통해 교감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시인이 이 시집을 통해서 우리에게 들려주는 소리의 질감은 다양하다. 가령 그것은 "입을 열어봐/내 입 속의 말을 줄게"(「석류」)에서는 대화의 형식으로 나타나고, "열매는 번식을 위해서만이 아니라/나무가 말을 하고 싶은 때를 위해 지어졌다"(「저 숲에 누가 있다」)에서는 존재자의 말건냄으로 표현된다. 또한 그것은 "小滿 지나면 들리는 소리"(「小滿」)와 "이따금 봄이 찾아와/새로 햇빛을 받은 말들이/따뜻한 물 속에 녹기 시작한 말들"(「이따금 봄이 찾아와」)에서 처럼 자연의 역동적 변화가 품고 있는 생성의 소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인의 귀에 들리는 자연의 소리들이 자연에로의 함몰이나 그것에 대한 예찬에 머문다면 굳이 우리가 이 시집에 주목해야 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 시의 전통 속에서 얼마든지 반복적으로 목격되기 때문이다. 나희덕의 이번 시집은 '소리'들의 모음이면서도 그것이 자연과 인간의 교감, 동시에 인간의 삶의 상처를 드러내는 한 방식이라는 점에서 여느 시들과 구분된다. 가령 "저 낡은 소리는/어떤 상처를 읽는 것이다"로 시작되는 「축음기의 역사」나 "빗물조차 오래 머금을 수 없던 집/때로 삭정이 부러지는 소리 툭툭 들리던 그 집"이라는 구절로 끝나는 「첫 나뭇가지」, "울음마다에는 병아리 깃털 같은 결이 있어서/들썩이는 어깨를 짚어보지 않아도/그것이 병을 마악 알았을 때의 울음인지/

죽음을 얼마 앞둔 울음인지/싸늘한 죽음 앞에서의 울음인지 알 수가 있다"라고 진술하는 「이 복도에서는」 등은 그 대표적인 경우들이다. 「축음기의 역사」에서 시인이 말하듯이 존재들이 내는 소리란 한편으로는 '상처'의 흔적일지도 모른다. 소리가 '상처'와 관계될 때 그것은 '통증'의 또 다른 이름이며, 나아가 그것의 흔적이다. 축음기 위의 '바늘'은 그 상처의 고통을 펼쳐 보이고자 하는 언어의 다른 표현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끝끝내 '소리가 태어난 침묵 속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듯이 결코 완성될 수 없다.


시인이 이번 시집에서 '언어'가 아닌 '소리'에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분절적인 언어보다는 차라리 '소리' 그 자체가 존재의 고통과 상처를 보다 절실하게 표현해 준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시인의 언어가 "……타다닥……따악……톡……타르르……"처럼 질감적이고 음성적인 표현형식을 닮아야 할 것이다. 「첫 나뭇가지」에 등장하는 다양한 '울

음'은 독자에게 삶의 비극성을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소리'이다. 이처럼 시인은 우리들의 일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소리'들 속에서 저마다의 숨은 결을 읽어 냄으로써 '소리'의 세계와 '삶'의 세계를 중첩시킨다.


그러나 소리는 '침묵'을 배경으로 할 때만이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소리가 태어난 침묵 속으로'라는 구절은 소리와 침묵의 이러한 관계를 잘 보여준다. 시인은 침묵의 시간을 한낮에서 저녁으로 넘어가는 사이, 즉 '5시 45분'으로 표현한다. 시집의 표제시이기도 한 「어두워진다는 것」에 등장하는 '5시 44분'과 '5시 45분' 사이의 짧은 간격, 그것은 인간의 오감이 시각에서 청각으로 교차되는 시간이며, 동시에 낮의 긴 여정이 마침내 밤으로 흘러드는 시간이다. 그리고 침묵과 어둠의 시간인 저녁은 "그토록 오래 서 있었던 뼈와 살/비로소 아프기 시작하고/가만, 가만, 가만히/금이 간 갈비뼈를 혼자 쓰다듬는 저녁"에서처럼 상처를 치유하는 시간이며, 나아가 "붓이 아닌 도끼로 씌어진 생활이 필요한 때라 한다/무엇을 베어낼 것인가, 하루에도 몇 번씩/내 안의 잡목숲을 들여다본다"처럼 자기 성찰의 시간이기도 하다. 시인은 밤이라는 침묵의 시간 속에서 소리를 통해 세계와 교감한다. 그 교감을 통해 그는 자신을 반성하기도 하고, 혹은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연과 시인의 소리를 통한 교감이 이처럼 상처에 대한 치유와 자기 성찰로 이어진다는 점이 그의 시를 돋보이게 한다. '5시 45분', 그것은 자연의 낮은 소리들이 조용히 제 소리를 낼 수 있는 배경으로서의 어둠(暗)이며, 동시에 삶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자기 성찰을 가능하게 하는 깊이로서의 어둠(玄)이다.


  - 고봉준
(문학평론가, 국어국문학과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