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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그 쓸쓸한 영혼

‘자유로운 영혼’ - 백석 시.

하루종일 동네에 비가 내렸다.






나는 北關(북관)에 혼자 앓아누워서
어느 아침 의원을 뵈이었다
의원은 如來(여래) 같은 상을 하고 關公(관공)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데냐 한다
평안도 정주라는 곳이라 한즉
그러면 아무개씨 고향이란다
그러면 아무개씰 아느냐 한즉
의원은 빙긋이 웃음을 띠고
莫逆之間(막역지간)이라며 수염을 쓴다
나는 아버지로 섬기는 이라 한즉
의원은 또다시 넌즈시 웃고
말없이 팔을 잡아 맥을 보는데
손길은 따스하고 부드러워
고향도 아버지도 아버지의 친구도 다 있었다


- 백석 시‘고향‘모두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같이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 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 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 오리가 눈물 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 백석 시 '여승' 모두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즈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알응알 울을 것이다


  -백석 詩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전문




오늘 저녘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 던지고
때글은 낡은 무명 샷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묵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메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 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을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아 대구국 끓여놓고 저녘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끼고 저녘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 하는 듯이 나를 울컥하는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적에 그가 가장 위대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스 쨈'과 '도연맹'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 하듯이


  -백석 詩 '흰 바람벽 이 있어'전문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메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오는데,
나는 어느 木手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또 문밖에 나가지도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올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바라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녘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히 서서,
어두워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백석 시 '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전문





거미 새끼 하나 방비딕에 내린 것을 나는 아무 생각없이 문밖으로 쓸어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어느젠가 새끼 거미 쓸려 나간 곳에 큰 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 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삭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알만 한 알에서 가제* 깬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작은 새끼 거미가
이번엔 큰 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 미나 분명히 울고불고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아나 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이 보드라운 종이에 받아 또 문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와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가 쉬이 만나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하고 슬퍼한다

* <가제>는 ,막, 방금>이라는 뜻이다.


- 백석 시 ‘수라(修羅)‘모두
  * [사슴], 열린책들, 2022.
(한국 시집 초간본 100주년 기념판)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잠풍 날씨가 너무나 좋은 탓이고
가난한 동무가 새 구두를 신고 지나간 탓이고 언제나 꼭같은 넥타이를 매고 고운 사람을 사랑하는 탓이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또 내 많지 못한 월급이 얼마나 고마운 탓이고
이렇게 젊은 나이로 콧수염도 길러보는 탓이고 그리고 어늬 가난한 집부엌으로 달재 생선을 진장에 꼿꼿이 지진 것은 맛도 있다는 말이 자꼬 들려오는 탓이다


- 백석 시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모두
[정본 백석시집]고형진 엮음, 문학동네,2007.




밖은 봄철날 따디기의 누긋하니 푹석한 밤이다
거리에는 사람두 많이 나서 흥성흥성 할 것이다
어쩐지 이 사람들과 친하니 싸다니고 싶은 밤이다

그렇건만 나는 하이얀 자리 위에서 마른 팔뚝의
샛파란 핏대를 바라보며 나는 가난한 아버지를 가진 것과
내가 오래 그려오든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도 살틀하든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

또 내가 아는 그 몸이 성하고 돈도 있는 사람들이
즐거이 술을 먹으려 다닐 것과
내 손에는 신간서新刊書 하나도 없는 것과
그리고 그 `아서라 세상사世上社 ' 라도 들을  
유성기도 없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이 내 눈가를 내 가슴가를
뜨겁게 하는 것도 생각한다

- 백석 시 ‘내가 생각하는 것은‘모두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다산초당, 2005



마을에서는 세불 김을 다 매고 들에서
개장취념을 서너 번 하고 나면
백중 좋은 날이 슬그머니 오는데
백중날에는 새악시들이
생모시치마 천진푀치마의 물팩치기 껑추렁한 치마에
쇠주푀적삼 항라적삼의 자지고름이 기드렁한 적삼에
한끝나게 상나들이 옷을 있는 대로 다 내입고
머리는 다리를 서너켜레씩 들여서
시뻘건 꼬둘채댕기를 삐뚜룩하니 해 꽂고
네날백이 따배기신을 맨발에 바꿔 신고
고개를 몇이라도 넘어서 약물터로 가는데
무썩무썩 더운 날에도 벌 길에는
건들건들 씨언한 바람이 불어오고
허리에 찬 남갑사 주머니에는 오랜만에 돈푼이 들어 즈벅 이고
광지보에서 나온 은장두에 바늘집에 원앙에 바둑이
번들번들 하는 노리개는 스르럭스르럭 소리가 나고
고래를 몇이라도 넘어서 약물터로 오면
약물터엔 사람들이 백재일 치듯 하였는데
봉갓집에서 온 사람들도 만나 반가워 하고
깨죽이며 문주며 섭가락 앞에 송구떡을 사서 권하거니 먹거니 하고
그러다는 백중 물을 내는 소내기 함뿍 맞고
호주를 하니 젖어서 달아나는데
이번에는 꿈에도 못 잊는 봉가집에 가는 것이다
봉가집을 가면서도 칠월(七月) 그믐 초가을을 할 때까지
평안하니 집살이를 할 것을 생각하고
애끼는 옷을 다 적시어도 비는 씨원만 하다고 생각한다

- 백석 시 ‘칠월(七月) 백중‘모두



오늘은 정월 보름이다
   대보름 명절인데
   나는 멀리 고향을 나서 남의 나라 슬쓸한 객고에 있는 신세로다
   옛날 두보나 이백 같은 이 나라의 시인도
   먼 타관에 나서 이 날을 맞은 일이 있었을 것이다
   오늘 고향의 내 집에 있는다면
   새 옷을 입고 새 신도 신고 떡과 고기도 억병 먹고
   일가친척들과 서로 모여 즐거이 웃음으로 지날 것이련만
   나는 오늘 때묻은 입든 옷에 마른 물고기 한 토막으로
   혼자 외로이 앉어 이것저것 쓸쓸한 생각을 하는 것이다
   옛날 그 두보나 이백 같은 이 나라의 시인도
   이날 이렇게 마른 물고기 한 토막으로 외로이 쓸쓸한 생각을 한 적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이제 어느 먼 외진 거리에 한고향 사람의 조그마한 가업집이 있는 것을 생각하고
   이 집에 가서 그 맛스러운  떡국이라도 한 그릇 사먹으리라 한다
   우리네 조상들이 먼먼 옛날로부터 대대로 이 날엔 으레히 그러하며 오듯이
   먼 타관에 난 그 두보나 이백 같은 이 나라의 시인도
   이 날은 그 어느 한고향 사람의 주막이나 반관을 찾어 가서
   그 조상들이 대대로 하든 본대로 원소라는 떡을 입에 대며
   스스로 마음을 느꾸어 위안하지 않았을 것인가
   그러면서 이 마음이 맑은 옛 시인들은
   먼 훗날 그들의 먼 훗자손들도
   그들의 본을 따서 이날에는 원소를 먹을 것을
   외로이 타관에 나서도 이 원소를 먹을 것을 생각하며
   그들이 아득하니 슬펐을 듯이
   나도 떡국을 놓고 아득하니 슬플 것이로다
   아, 이 정월 대보름 명절인데
   거리에는 오독독이 탕탕 터지고 호궁소리 삘삘 높아서
   내 쓸쓸한 마음은 아마 두보나 이백 같은 사람들의 마음인지도 모를 것이다
   아무려나 이것은 옛투의 쓸쓸한 마음이다


- 백석 시 ‘두보杜甫나 이백李白 같이‘모두



나는 이 마을에 태어나기가 잘못이다
마을은 맨천 귀신이 돼서
나는 무서워 오력을 펼 수 없다
자 방안에는 성주님
나는 성주님이 무서워 토방으로 나오면 토방에는 디운귀신
나는 무서워 부엌으로 들어가면 부엌에는 부뚜막에 조앙님
나는 뛰쳐나와 얼른 고방으로 숨어 버리면 고방에는 또 시렁에 데석님
나는 이번에는 굴통 모퉁이로 달아가는데 굴통에는 굴대 장군
얼혼이 나서 뒤울 안으로 가면 뒤울 안에는 곱새녕 아래 털닝귀신
나는 이제는 할 수 없이 대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대문간에는 근력 세인 수문장
나는 겨우 대문을 삐쳐나 바깥으로 나와서
밭 마당귀 연자간 앞을 지나가는데 연자간에는 또 연자당 귀신
나는 고만 질겁을 하여 큰 행길로 나서서
마음 놓고 화리서리 걸어가다 보니
아아 말 마라 내 발뒤축에는 오나가나 묻어 다니는 달걀귀신
마을은 온데간데 귀신이 돼서 나는 아무데도 갈 수 없다

- 백석 시 ‘마음은 맨천 귀신이 돼서‘모두


빨간 물 짙게 든 얼굴이 아름답지 않으뇨.
빨간 정(情) 무르녹는 마음이 아름답지 않으뇨.
단풍든 시절은 새빨간 웃음을 웃고 새빨간 말을
지줄댄다.
어데 청춘(淸春)을 보낸 서러움이 있느뇨.
어데 노사(老死)를 앞둔 두려움이 있느뇨.
재화가 한끝 풍성하야 시월(十月) 햇살이 무색하다.
사랑에 한창 익어서 실찐 띠몸이 불탄다.
영화의 자랑이 한창 현란헤서 청청한울이 눈부셔 한다.
시월(十月)시절은 단풍이 얼굴이요, 또 마음인데 시월단풍도 높다란 낭떨어지에 두서너 나무 깨웃듬이 외로히 서서 한들거리는 것이 기로다.
시월 단풍은 아름다우나 사랑하기를 삼갈 것이니 울어서도 다하지 못한 독한 원한이 빨간 자주로 지지우리지 않느뇨.

- 백석 시 ‘단 풍 (丹 楓)‘모두



나는 고독과 나란히 걸어간다
휘파람 호이호이 불며
교외로 풀밭길의 이슬을 찬다

문득 옛일이 생각키움은-
그 시절이 조아졌음이라
뒷산 솔밭 속에 늙은 무덤 하나
밤마다 우리를 맞어 주었지만 어떠냐!

그때 우리는 단 한 번도
무덤 속에 무엇이 묻혔는 가를 알려고 해 본 적도 느껴 본 적도 없었다
떡갈나무 숲에서 부엉이가 울어도 겁나지 않었다

그 무렵 나는 인생의 제1과를 즐겁고 행복한 것으로 배웠다
나는 고독과 나란히 걸어간다
하늘 높이 단장(短杖) 홰홰 내두르며
교외 풀밭길의 이슬을 찬다
그 날 밤
성좌도 곱거니와 개고리 소리 유난유난 하였다
우리는 아무런 경계도 필요없이 금모래 구르는 청류수에 몸을 담갔다
별안간 뇌성벽력이 울부짖고 번개불이 어둠을 채질했다
다음 순간 나는 내가 몸에 피를 흘리며 발악했던 것을 깨달었고
내 주위에서 모든 것이 떠나 갔음을 알았다

그때 나는 인생의 제2과를 슬픔과 고적과 애수를 배웠나니
나는 고독과 나란히 걸어간다
깃폭인양 옷자락 펄펄 날리며
교외 풀밭길의 이슬을 찬다

낙사랑絡絲娘의 잣는 실 가늘게 가늘게 풀린다
무엇이 나를 적막의 바다 한가운데로 떠박지른다
나는 속절없이 부서진 배 쪼각인가?
나는 대고 밀린다
적막의 바다 그 끝으로
나는 바닷가 사장으로 밀려 밀려 나가는 조개 껍질인가?
오! 하늘가에 홀로 팔짱끼고 우-뚝 선 저-거무리는
그림자여......



- 백석 시 ‘고독(孤獨)‘모두
***낙사랑; 실을 두른 여자



옛날엔 통제사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의 처녀들에겐 옛날이 가지 않은 천희라는 이름이 많다
미역오리 같이 말라서 굴껍질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
이 천희의 하나를 나는 어느 오랜 객주 집의 생선 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
저문 유월의 바닷가에선 조개도 울을 저녁 소라방등이 붉으레한 마당에 김냄새 나는 비가 나렸다.


- 백석 시 ‘통영 1‘

*천희: 바닷가에서 시집 안 간 여자를 '천희'라고 하였음. 또한 천희는 남자를 잡아먹는(죽게 만드는) 여자라는 속뜻도 있다.
*미역오리: 미역줄기.
*소라방등: 소라의 껍질로 만들어 방에서 켜는 등잔.



구마산의 선창에선 좋아하는 사람이 울며
나리는 배에 올라서 오는 물길이 반날
갓 나는 고당은 가깝기도 하다

바람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잘한

전복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좋고
파래에 아개미에 호루기의 젓갈이 좋고

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밤새껏 바다에선 뿡뿡 배가 울고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

집집이 아이만한 피도 안 간 대구를 말리는 곳
황화장사 영감이 일본말을 잘도 하는 곳
처녀들은 모두 어장주한테 시집을 가고 싶어한다는 곳

산 너머로 가는 길 돌각담에 갸웃하는 처녀는 금이라는 이 같고 내가 들은 마산 객주집의 어린 딸은 난이라는 이 같고

난이라는 이는 명정골에 산다는데
명정골은 산을 넘어 동백나무 프르른 감로 같은 물이 솟는 샘이 있는 마을인데
갬터넨 오구작작 물을 깉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긴 토시 끼고 큰머리 얹고 오불고불 넘엣거리고 가는 여인은 평안도서 오신 듯한데 동백꽃 피는 철이 그 언제요

옛 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어서 나는 이 저녁 울 듯 울 듯 한산도 바다에 뱃사공이 되어가며
녕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


- 백석 시 ‘통영 2‘

*고당: 고장.
*아개미: 아가미.
*호루기: 쭈꾸미와 비슷하게 생긴 해산물.
*황화장사: 온갖 잡살뱅이의 물건을 지고 집집이 찾아다니며 파는 사람.
*오구작작: 여러 사람이 뒤섞여 떠드는 수선스런 모양.
*녕: 이엉.




바닷가에 왔드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뒷선 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은 것만 같구려

바닷가는
개지꽃에 개지 아니 나오고
고기비눌에 하이얀 햇볕만 쇠리쇠리하야
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섧기만 하구려


- 백석 시 ‘바다’




- 백석( 白石): 1912. 7. 1 평북 정주 ~ 1995. 1. (83세) 본명은 백기행(白夔行),필명은 백석(白石, 白奭)인데 주로 '白石'으로 활동했다. 일본의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의 시를 너무나도 좋아하여 그의 이름의 '석'을 빼와서 썼다고 한다. 과거 한국에서는 월북 작가라는 인식이 강해 언급을 피하는 편이었다.그러나 월북 문인의 해방 이전 작품에 대한 공식 해금 조치가 이루어진 1988년부터 다시 각광을 받기 시작한다. 토속적인 우리말로 민중들의 삶을 노래한 뛰어난 시인으로, 지금도 많은 시인들이 인정하고 존경하는 명실상부한 현대시 최고의 절창으로 꼽힌다.

해방 후 고향 정주에 머물면서 글을 썼으며, 6·25전쟁 뒤에는 북한에 그대로 남았다. 1936년에 펴낸 시집 〈사슴〉에 그의 시 대부분이 실려 있으며, 시 〈여승 女僧〉에서 보이듯 외로움과 서러움의 정조를 바탕으로 했다. <여우 난 곬족>(조광, 1935. 12)·〈고야 古夜〉(조광, 1936. 1)에서처럼 고향의 지명이나 이웃의 이름, 그리고 무술(巫術)의 소재가 자주 등장하며 정주 사투리를 그대로 썼는데, 이것은 일제강점기에 모국어를 지키려는 그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사슴> 이후에는 시집을 펴내지 못했으며 그뒤 발표한 시로는 〈통영 統營〉(조광, 1935. 12)·〈고향〉(삼천리문학, 1938. 4)·〈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학풍, 1948. 10) 등 50여 편이 있다.

시집으로 1987년 창작과비평사에서 〈백석시전집〉과 1989년 고려원에서 〈흰 바람벽이 있어〉


[ 자야부인에 대하여 ]

김자야(金子夜): 1916년 서울 관철동에서 태어나. 일찍 부친을 여의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했다. 금광을 한다는 친척에게 속아 가정이 파산하게 되자. 1932년 김수정의 도움으로 조선 권번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다. 한국 정약계의 대부였던 금하 하규일 선생의 지도를 받아 여창 가곡. 궁중무 등 가무의 명인으로 성장했다.

1935년 조선어학회 회원이던 해관 신윤국 선생의 후원으로 일본에 가서 공부하던 중. 해관 선생이 투옥되자 면회차 귀국하여 함흥에 일시 머물렀다. 1936년 함흥에서 영생고보 영어교사로 와 있던 청년 시인 백석과 뜨거운 사랑에 빠졌다. 1938년 백석이 함께 만주로 떠나자고 제의했으나 혼자 서울로 돌아왔다. 같은 해에 『조선일보』기자로 다시 서울로 뒤따라온 백석과 재회하고, 청진동에서 살림을 차렸다. 1939년 백석이 만주의 신찡으로 떠나게 되면서 이별했다. 1953년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만학으로 졸업했다.

1989년 백석 시인에 대한 회고 기록 「백석, 내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을 『창작과 비평』에 발표한 바 있고, 1990년 스승 하규일의 일대기와 가곡 악보를 채록한 『선가 하규일 선생 약전』을 출간했다.

- 2001/04/30 동아일보 자료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