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
모두들 한 결 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빚 얘기
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별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시 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 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결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 신경림 시 ‘파장(罷場)’모두
그의 가난과 추위가 어디 그만의 것이랴.
그는 좁은 어깨와 야윈 가슴으로 나의 고통까지 떠안고
역 대합실에 신문지를 덮고 누워 있다.
아무도 그를 눈여겨보지 않는다.
간혹 스치는 것은 모멸과 미혹의 눈길뿐.
마침내 그는 대합실에서도 쫓겨나 거리를 방황하게 된다.
찬 바람이 불고 눈발이 치는 날 그의 영혼은 지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걸어올라가 못 박히는 대신
그의 육신은 멀리 내쫓겨 광야에서 눈사람이 되겠지만.
그 언 상처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도
사람들은 그가 부활하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을 것이다.
다시 대합실에 신문지를 덮고 그들을 대신해서 누워 있으리라는 걸.
그들의 아픔, 그들의 슬픔을 모두 끌어안고서.
- 신경림 시 ‘나의 예수‘모두
*사진관집 이층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 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 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 신경림 시 ‘가난한 사랑노래‘- 이웃의 한 젊은이를 위하여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우 끓어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 신경림 시 ‘목계장터‘모두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꺼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 신경림 시 ‘농무(農舞)‘모두
- 농사꾼 대서쟁이 김장순씨에게
뻘밭에 갈매기만 끼룩대는 폐항
길다란 장터 끝머리에 있는 이층 대서방은
종일 불기가 없어도 훈훈하다
사람들은 돈 대신
막걸리 한 주전자씩을 들고 와
진정서와 고발장을 써 받고
대서사는 묵은 잡지 뒤숭숭한 시렁에서
마른 북어를 안주로 꺼내놓고 한마디한다
사람은 착하게 사는 게 제일이랑께
그저 착하게 사는 게 제일이랑께
그래서 줄포 폐항의 기다란 장터
술집에서 사람들은 나그네더라도 말한다
사람은 착한 게 제일이랑께
그저 착하게 사는 게 제일이랑께
- 신경림 시 ‘* 줄포‘모두
[길], 창비, 1990.
* 줄포는 한때는 전북에서 군산항 다음가는 큰 상항이었으나 30년대부터 토사가 밀려들어 바다가 메워지면서 이제는 항구로서의 기능을 거의 상실했다.
고향집 앞 느티나무가
터무니없이 작아 보이기 시작한 때가 있다
그때까지는 보이거나 들리던 것들이
문득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나는 잠시 으아해하기는 했으나
내가 다 커서거니 여기면서
이게 다 세상 사는 이치라고 생각했다
오랜 세월이 지나 고향엘 갔더니
고향집 앞 느티나무가 옛날처럼 커져 있다
내가 늙고 병들었구나 이내 깨달았지만
내 눈이 이미 어두워지고 귀가 멀어진 것을
나는 서러워하지 않았다
다시 느티나무가 커진 눈에
세상이 너무 아름다웠다
눈이 어두워지고 귀가 멀어져
오히려 세상의 모든 것이 더 아름다웠다
- 신경림 시 ‘다시 느티나무가’모두
[사진관집 이층], 창비, 2014.
흔들리는 버스 속에서 뒤돌아본다.
푸섶길의 가없음을 배우고
저녁노을의 아름다움을 배우고
새소리의 기쁨을 비로소 안 한 해를,
비탈길을 터벅거리며 뒤돌아본다.
저물녘 내게 몰아쳐온 이 바람,
무엇인가, 송두리째 나를 흔들어 놓는
이 폭풍 이 바람은 무엇인가,
눈도 귀도 멀게 하는, 해도 달도
멎게 만드는 이것은 무엇인가.
자리에 누워 뒤돌아본다,
만나는 일의 설레임을 알고
마주 보는 일의 뜨거움을 알고
헤어지는 일의 아픔을 처음 안 한 해를,
꿈 속에서 다시 뒤돌아본다,
삶의 뜻을 또 새로 본 이 한 해를.
- 신경림 시 ‘세밑’모두
스나미에 온 가족이 쓸려나간 가운데 개 한마리가 살아남았다.
카메라에 잡혔다.
조용한 바다를 배경으로,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무엇인가 말하고 싶다고, 그 눈은 말한다.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좌로 다시 우로 돌린다.
누구일까, 개로 하여금 하고 싶은 말을 못하게 하는 그는.
또 사람한테 개의 말을 들을 능력을 갖지 못하게 한 그는.
- 신경림 시‘누구일까’모두
*사진관집 이층
눈 속으로 눈 속으로 걸어들어가니 산이 있고 논밭이 있고 마을이 있고,
내가 버린 것들이 모여 눈을 맞고 있다.
어떤 것들은 반갑다 알은체를 하고 또 어떤 것들은 섭섭하다 외면을 한다.
나는 내가 그것들을 버린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나를 버렸다고 강변하면서,
눈 속으로 눈 속으로 걸어들어가다가 내가 버린 것들 속에 섞여 나도 버려진다.
나로부터 버려지고 세상으로부터 버려진다.
눈 속으로 눈 속으로 걸어들어가면서 나는 한없이 행복하다.
내가 버린 것들 속에 섞여 버려져서 행복하고 나로부터 버려져셔 행복하다.
- 신경림 시 ‘설중행(雪中行)‘모두
*사진관집 이층
아무래도 나는 늘 음지에 서 있었던 것 같다
개선하는 씨름꾼을 따라가며 환호하는 대신
패배한 장사 편에 서서 주먹을 부르쥐었고
몇십만이 모이는 유세장을 마다하고
코흘리개만 모아놓은 초라한 후보 앞에서 갈채했다
그래서 나는 늘 슬프고 안타깝고 아쉬웠지만
나는 불행하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
나는 그러면서 행복했고
사람 사는 게 다 그러려니 여겼다
쓰러진 것들의 조각난 꿈을 이어주는
큰 솜이 있다고 결코 믿지 않으면서도
- 신경림 시 ‘쓰러진 것들을 위하여‘모두
*사진관집 이층
사진관집 이층에 하숙을 하고 싶었다.
한밤에도 덜커덩덜커덩 기차가 지나가는 사진관에서
낙타와 고래를 동무로 사진을 찍고 싶었다
아무 때나 나와 기차를 타고 사막도 바다도 갈 수 있는,
누군가 날 기다리고 있을 그 먼 곳에 갈 수 있는,
어렸을 때 나는 역전 그 이층에 하숙을 하고 싶었다.
이제는 꿈이 이루어져 비행기를 타고
사막도 바다도 다녀봤지만, 나는 지금 다시
그 삐걱대는 다락방에 가 머물고 싶다.
아주 먼 데서 찾아왔을 그 사람과 함께 누워서
덜컹대는 기차 소리를 듣고 싶다.
양철지붕을 두드리는 소낙비 소리를 듣고 싶다.
낙타와 고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싶다.
다락방을 나와 함께 기차를 타고 싶다.
그 사람이 날 찾아온 길을 되짚어가면서
어두운 그늘에도 젖고 눈부신 햇살도 쬐고 싶다.
그 사람의 지난 세월 속에 들어가
젖은 머리칼에 어른대는 달빛을 보고 싶다.
살아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첫날을
다시 그 삐걱대는 사진관집 이층에 가 머물고 싶다.
- 신경림 시 ‘역전 사진관집 이층‘모두
*사진관집 이층( 창비, 2014)
나이 들어 눈 어두우니 별이 보인다
반짝반짝 서울 하늘에 별이 보인다
하늘에 별이 보이니
풀과 나무 사이에 별이 보이고
풀과 나무 사이에 별이 보이니
사람들 사이에 별이 보인다
반짝반짝 탁한 하늘에 별이 보인다
눈 밝아 보이지 않던 별이 보인다
- 신경림 시 ‘별‘모두
* <발견> 2014년 봄호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 신경림 시 '낙타'모두
철물점 지나 농방(籠房) 그 건너가 바로 이발소,
엿도가에 잇대어 푸줏간 그 옆이 호떡집, 이어
여보세요 부르면 딱부리 아줌마 눈 부릅뜨고
어서 옵쇼 내다볼 것 같은 신발가게.
처음 걷는 길인데도 고향처럼 낯이 익어.
말이 다르고 웃음이 다른 고장인데도,
서로들 사는 것이 비슷비슷해 보이고.
그러다 내 고장에 와서 나는 남이 된다,
큰길도 골목도 달라진 게 없는데도.
너무 익숙해 들여다보면 장바닥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들로 가득하고,
술집은 표정 모를 얼굴들로 소란스럽다.
말이 같고 몸짓이 같아 오히려 낯이 서니
서로들 사는 것이 이렇게도 다른 걸까.
나와 세상 사이에는 강물이 있나보다.
먼 세상과 나를 하나로 잇는 강물이,그리고
가까운 세상과 나를 둘로 가르는 강물이.
- 신경림 시 ‘나와 세상 사이에는‘모두
* <낙타> 창비, 2008
나무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서서
하늘을 향해 길게 팔을 내뻗고 있다
밤이면 손끝에 아름다운 별빛을 받아
드러낸 몸통에서 흙 속에 박은 뿌리까지
그것으로 말끔히 씻어내리는 것이겠지
터진 살갗에 새겨진 고달픈 삶이나
뒤틀린 허리에 배인 구질구질한 나날이야
부끄러울 것도 숨길 것도 없어
한밤에 내려 몸을 덮는눈 따위
흔들어 털어 다시 알몸이 되겠지만
알고 있을까 그들 때로 서로 부둥켜안고
온몸을 떨며 깊은 울음을 터뜨릴 때
멀리서 같이 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 신경림 시 ‘나목‘모두
[시인의 시인 탐험]월간조선사
살아오면서 나는 너무 많은 것을 얻었나보다
가슴과 등과 팔에 새겨진
이 현란한 무늬들이 제법 휘황한 걸 보니
하지만 나는 답답해온다 이내
몸에 걸친 화려한 옷과 갑진 장신구들이 무거워지면서
마룻장 밑에 감추어 놓았던
갖가지 색깔의 사금파리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교정의 플라타너스 나무에
무딘 주머니칼로 새겨놓은 내 이름은 남아 있을까
성탄절 가까운
교회에서 들리는 풍금소리가
노을에 감기는 저녁
살아오면서 나는 너무 많은 것을 버렸나보다
- 신경림 시 ‘성탄절 가까운‘모두
산동네에 부는 바람에서는
멸치 국물 냄새가 난다
광산촌 외진 정거장 가까운 대포집
손 없는 술청
연탄 난로 위에 끓어넘는
틀국수 냄새가 난다
산동네에 부는 바람에서는
기차바퀴 소리가 들린다
갯비린내 싣고 소금밭을 지나는
주을이라 군자의 협궤차 소리가 들린다
황석어젓 이고 새벽장 보러 가는
아낙네들의 북도 사투리가 들린다
산동네에 부는 바람에서는
갈대밭이 보인다
암컷 수컷 아우러져 갈갬질하는
개개비가 보이고 물총새가 보인다
강가 깊드리에서 나래질하는
옛날의 내 동무들이 보인다
바람 부는 날이면 그래서
산동네 사람들은 꿈을 꾼다
버들고리에 체나 한 짐씩 덩그머니 지고
그 옛날의 무자리되어 길 떠나는 꿈을
가세가세 흥얼대며 길 떠나는 꿈을.
- 신경림 시 ‘바람부는 날‘모두
이제 그만둘까보다, 낯선 곳 헤매는 오랜 방황도
황홀하리라, 잊었던 옛 항구를 찾아가
발에 익은 거리와 골목을 느릿느릿 밟는다면.
차가운 빗발이 흩뿌리리, 가로수와 전선을 울리면서.
꽁치 꼼장어 타는 냄새 비릿한 목로에서는
낯익은 얼굴도 만나리, 귀에 익은 목소리도 들리리.
이내 어둠은 옛날의 소꼽동무처럼 다가오고,
발길 따라 깊숙한 골목 여인숙 찾아 들어가면
눅눅하고 퀴퀴해서 한결 편해지는 잠자리.
꿈인 듯 생시인 듯 들리리, 네가 가 잠들 곳 또한
이같은 익숙한 곳 편안한 곳이라는 소리가, 먼데서.
- 신경림 시 ‘루항요(陋港遙)‘모두
* [2002 좋은 시/ 푸른사상]
젖은 나뭇잎이 날아와 유리창에 달라붙는
간이역에는 찻시간이 돼도 손님이 없다
플라타너스로 가려진 낡은 목조 찻집
차 나르는 소녀의 머리칼에서는 풀냄새가 나겠지
오늘 집에 가면 헌 난로에 불을 당겨
먼저 따끈한 차 한잔을 마셔야지
빗물에 젖은 유행가 가락을 떠밀며
화물차 언덕을 돌아 뒤뚱거리며 들어설 제
붉고 푸른 깃발을 흔드는
늙은 역무원 굽은 등에 흩뿌리는 가을비
- 신경림 시 ‘가을비‘모두
* 시집<쓰러진 자의 꿈>.창작과비평사.1993
불빛 환한 방안에는 커피 향내 짙겠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요정처럼 춤추겠지
진눈깨비 치는 어두운 밤길을
다리 절면서 사람들은 가고
젊은 부부 연속극 앞에 넋잃고 앉아 있을 거야
달콤한 대사에 눈시울들이 붉었을 거야
옷속으로 파고드는 매운 칼바람
여미는 손은 나무껍질처럼 갈라졌다
내일 모레가 설 선물 꾸러미도 챙겨야지
어린 시절의 이야기들 끝도 한도 없어
진창과 허방 끝없이 이어져
빠지고 고꾸라지면서 사람들은 절망하고
밤 이슥하면 사내들은 허풍을 칠 거야
짐짓 속아주면서 아내들은 즐거울 거야
천둥과 번개가 귀와 눈을 찢는
밤길은 갈수록 험하고 어두워
차도 바꾸고 집도 늘려야지
내년에는 괌으로 바캉스를 가야지
새벽은 언제 오느냐 좌절 속에
지쳐서 주저앉는 사람들 쓰러지는 사람들
불 꺼진 방안에는 숨소리들이 거칠겠지
사랑은 속될수록 즐거운 거니까
온몸에 감긴 시퍼런 멍
놀래대듯 그 위에 진눈깨비는 퍼붓고
평화롭겠지 이윽고 저 고른 숨소리들
모를 거야 밤길도 진눈깨비도 모를 거야
- 신경림 시 ‘진눈깨비 속을 가다‘모두
* 시집<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창작과비평사
언제부터 갈대는 속으로
조요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 신경림 시 ‘갈대’모두
꽃을 좋아해 비구 두엇과 눈 속에 핀 매화에 취해도 보고
개망초 하얀 간척지 농투성이 농성에 덩달아도 보고
노래가 좋아 기성화장수 봉고에 실려 반도 횡단도 하고
버려진 광산촌에서 중로의 주모와 동무로 뒹굴기도 하고
이래서 이 세상에 돌로 버려지면 어쩌나 두려워하면서
이래서 이 세상에 꽃으로 피었으면 꿈도 꾸면서
- 신경림 시 ‘돌 하나, 꽃 한 송이‘모두
밤새워 문짝이 덜컹대고
골목을 축축한 바람이 쓸고 있다.
헐린 담장에 어수선한 두엄더미 우에
살구꽃이 피고 어지럽게
피어서 꺾이고 밟히고
그래도 다시 피는 4월.
나는 남한강 상류 외진 읍내에 와서
통금도 없는 빈 거리를 헤매면서
어느새 잊어버린
그날의 함성을 생각했다.
티끌처럼 쏠리며 살아온 나날.
돌처럼 뒹굴며 이어온 세월.
다시 그날의 종소리가 들리라고
아무도 믿지 않는 밤은 어두웠다.
친구를 생각했다. 찬 돌에 이마를 대고
깊은 잠이 들었을 친구를
그 손톱에 배었을 핏자국을.
4월이 와도 바람은 그냥 차고
살구꽃이 피어도 흐느낌은 더 높은데
축축한 바람은 꽃가지에 와 매달려
친구들의 울음처럼 잉잉댔다.
진달래도 개나리도 피고
꺾이고 밟히고 다시 피는 4월
밤은 좀체 밝아오지 않았다.
- 신경림 시 ‘4월 19일, 시골에 와서‘
* 여름날(미래사, 1991)
가볍게 걸어가고 싶다.
석양 비낀 산길을.
땅거미 속에 긴 그림자를 묻으면서.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
콧노래 부르는 것도 좋을 게다.
지나고 보면 한결같이 빛 바랜 수채화 같은 것.
거리를 메우고 도시에 넘치던 함성도.
물러서지 않으리라 굳게 잡았던 손들도.
모두가 살갗에 묻은 가벼운 티끌 같은 것.
수백 밤을 눈물로 새운 아픔도.
가슴에 피로 새긴 증오도.
가볍게 걸어가고 싶다.
그것들 모두 땅거미 속에 묻으면서.
내가 스쳐온 모든 것들을 묻으면서.
마침내 나 스스로 그 속에 묻히면서.
집으로 가는 석양 비낀 산길을.
- 신경림 시 ‘집으로 가는 길’
외진 별정우체국에 무엇인가를 놓고 온 것 같다
어느 삭막한 간이역에 누군가를 버리고 온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문득 일어나 기차를 타고 가서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 좁은 골목을 서성이고
쓰레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린 저잣거리도 기웃댄다
놓고 온 것을 찾겠다고
아니. 이미 이 세상에 오기 전 저 세상 끝에
무엇인가를 나는 놓고 왔는지도 모른다
쓸쓸한 나룻가에 누군가를 버리고 왔는지도 모른다
저 세상에 가서도 다시 이 세상에
버리고 간 것을 찾겠다고 헤매고 다닐는지도 모른다
- 신경림 시 ‘떠도는 자의 노래‘모두
다리도 못 펴고 누워 있는 초췌한 몸 속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다
미라가 다 되어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육신 속에서 나
오는 소리가 아니다
이승과의 인연을 외면하여 밀폐된 검은 관 속에서 나
오는 소리가 아니다
드디어 뗏장이 입혀진 어둡고 축축한 무덤 속에서 나
오는 소리가 아니다
나비가 떼지어 나는 소리도 함께 들리는
가지각색 꽃들의 빛깔과 향기도 따라 보이는
"어머니"부르면 "그래" 대답하는 저 맑고 담담한 소
리는
- 신경림 시 ‘저 소리는 어디에서‘모두
이사할 적에는 새 바람 새 빛을 바랐나보다.
그래서 나는 실망한다. 십칠년 만에 이사한 동네가
옛날에 떠났던 바로 그 동네여서.
그래도 반가워서 이 언덕 저 골목 서성이는데
놀랍구나, 모든 게 이렇게 새롭다니.
아기들이 새롭다, 연립주택 낡은 문을 밀고 나오는.
젊은 엄마들이 새롭다, 뒤따라 나오는 헐렁한 옷 속의.
그루터기가 새롭다, 가지 잘린 플라타너스의.
간판이 새롭다, 새로 단장한 머리방의.
새롭지 않은 것은 오직, 오래되고 낡은 것들 속에서
새로운 것을 찾아 걷는 내 걸음뿐.
- 신경림 시 ‘지상에 새롭지 않은 것은 없다‘모두
특하면 아버지는 오밤중에
취해서 널브러진 색시를 업고 들어왔다,
어머니는 입을 꾹 다문 채 술국을 끓이고
할머니는 집안이 망했다고 종주먹질을 해댔지만,
며칠이고 집에서 빠져나가지 않는
값싼 향수내가 나는 싫었다
아버지는 종종 장바닥에서
품삯을 못 받은 광부들한테 멱살을 잡히기도 하고,
그들과 어울려 핫바지춤을 추기도 했다,
빚 받으러 와 사랑방에 죽치고 앉아 내게
술과 담배 심부름을 시키는 화약장수도 있었다.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나는 자랐다,
아버지가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노라고
이것이 내 평생의 좌우명이 되었다,
나는 빚을 질 일을 하지 않았다,
취한 색시를 업고 다니지 않았고,
노름으로 밤을 지새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런 아들이 오히려 장하다 했고
나는 기고만장했다, 그리고 이제 나도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진 나이를 넘었지만,
나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
일생을 아들의 반면교사로 산 아버지를
가엽다고 생각한 일도 없다, 그래서
나는 늘 당당하고 떳떳했는데 문득
겨울을 쳐다보다가 놀란다, 나는 간 곳이 없고
나약하고 소심해진 아버지만이 있어서,
취한 색시를 안고 대낮에 거리를 활보하고,
호기있게 광산에서 돈을 뿌리던 아버지 대신,
그 거울속에는 인사동에서도 종로에서도
제대로 기 한번 못 펴고 큰 소리 한번 못 치는
늙고 초라한 아버지만이 있다.
- 신경림 시‘아버지의 그늘‘
그녀네 집이 멀어서
북적대는 시게전을 지나야 한다
골목을 벗어나면 언덕이 있고
싸리울 하얀 꽃 속에 그녀는 산다
방은 늘 비어 있어 어른대는
살구꽃에 취해 잠이 들었다 눈을 뜨면
꽃 그림자가 방문을 덮는다
그녀네 집이 너무 멀어서
물 머금은 보름달을 등에 지고
내려오는 길은 더욱 멀다
골목을 벗어나고 시게전을 지나서
외진 모퉁이 들여다보면
꼬치집에도 그녀는 없다
기다리며 구석에 앉아 술을 마시다가
갑자기 나는 잊는다 그녀의 얼굴을
체취를 잊고 이름을 잊는다
그녀네 집에 멀어서
시게전을 잊고 유행가가 자욱한 골목을 잊고
싸리울 하얀 빈 방을 잊고 비릿한 이불자락을 잊고.....
당초부터 이 세상에 없는지도 모를
그녀네 집이 너무 멀어서.
- 신경림 시 ‘그녀네 집이 멀어서‘
*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나의 소원은 따끈한 밥 한 그릇
어머니와 함께 할 따끈한 밥 한 그릇
나의 소원은 전세방 한 칸
잠도 자고 꿈도 꿀 작은 방 하나
나의 소원은 편안한 하루
언니 오빠 함께 쉴 조용한 하루
나의 소원은 아늑한 일터
눈 부라리는 이 없는 화목한 일터
노래하며 함께 일할 정다운 동무
말하지 말라 모두들 네 편이라고
신문에 실릴 이름 석자 위해
족보에 오를 서푼짜리 벼슬을 위해
거짓웃음으로 턱이 굳어 있으면서
자기 아들딸만의 행복을 위해서
자기 가족만의 안녕을 위해서
모두 잠든 밤에 홀로 한숨 쉬면서
우리의 소원은 따스한 나라
네 꿈 내 꿈 이루게 할 즐거운 나라
우리의 소원은 밝은 세상
속임수 안 통하는 신나는 세상.
- 신경림 시 ‘우리의 소원‘모두
할아버지는 두루마기에 지팡이를 짚고
훠이훠이 바람처럼 팔도를 도는 것이 꿈이었다
집에서 장터까지 장터에서 집까지 비칠걸음을 치다가
느티나무 한그루를 심고 개울을 건너가 묻혔다
할머니는 산을 넘어 대처로 나가 살겠노라 노래삼았다
가마솥을 장터까지 끌고 나가 틀국수집을 하다가
느티나무가 다섯자쯤 자라자 할아버지 곁에 가 묻혔다
아버지는 큰돈을 잡겠다며 늘 허황했다
광산으로 험한 장사로 노다지를 찾아 허둥댄 끝에
안양 비산리 산비알집에 중풍으로 쓰러져 앓다가
터덜대는 장의차에 실려 할아버지 발치에 가 누웠다
그 사이 느티나무는 겨우 또 다섯자가 자랐다
내 꿈은 좁아빠진 느티나무 그늘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강을 건너 산을 넘어 한껏 내달려 스스로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아버지와 다른 사람이 되었다
나는 그런 자신이 늘 대견하고 흐뭇했다
하지만 나도 마침내 산을 넘어 강을 건너 하릴없이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아버지 발치에 가 묻힐 때가 되었다
나는 그것이 싫어 들입다 내달리지만
느티나무는 참 더디게도 자란다
- 신경림 시 ‘더딘 느티나무‘모두
영흥도에서 만난 소장수 신정섭씨는
꼭 세 마디만 가지고 소를 몬다
고삐 당겨 이랴이랴로 끌고
딴 곳으로 가려는 소 어뎌어뎌로 막고
힘들어 숨차하면 워워로 세운다
소장수 신정섭씨는 뭐든지 다 안다
소 눈만 끔뻑해도 가려운 데 어덴 줄 알고
귀만 쫑긋해도 아픈 데 어덴 줄 안다
소 몰고 가는 길 어데쯤
도랑이 있고 돌이 박힌 것도 훤히 알고
길에서 만나는 남의 소 나이며
성질까지도 담박 안다
그래서 소장수 신정섭씨는 세 마디만 가지고
세상을 몰겠다는 사람들이 밉다
백성의 어데가 아프고
어데가 가려운 줄도 모르면서
이랴이랴로 끌고 어뎌어뎌로만 다스리려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밉다 못해 가엾다
어디에 물이 있고
어디에 불이 있는 줄도 모르면서
워워로만 막으려는 사람들이
가엾다 못해 불쌍하다
세 마디만 가지고 세상을 몰려다가
물고문 불고문으로 사람을 잡고
몽둥이질 발길질로 나라를 잡고
마침내 성고문으로 스스로 짐승이 된
얼빠진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다가
뭐든지 아는 소장수 신정섭씨는
그 아들딸까지 모조리 잡아다가
한 백 년쯤 소장수를 시키고 싶다
여름 겨울 없이 섬을 떠도는
한 천 년쯤 소장수를 시키고 싶다
단 세 마디로 거꾸로 소한테 끌려다니는
순하디순한 소가 되게 하고 싶다
이랴이랴 어뎌어뎌 워워 세 마디로 소를 몰면서.
- 신경림 시 ’소장수 신정섭씨‘
옛사람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때가 있다
배낭을 멘 채 시적시적
걸어들어가고 싶은 때가 있다
주막집도 들어가보고
색시들 수놓는 골방문도 열어보고
대장간에서 풀무질도 해보고
그러다가 아예 나오는 길을
잃어버리면 어떨까
옛사람의 그림 속에
갇혀버리면 어떨까
문득 깨달을 때가 있다
내가 오늘의 그림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을
나가는 길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두드려도 발버둥쳐도
문도 길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오늘의 그림에서
빠져나가고 싶을 때가 있다
배낭을 메고 밤차에 앉아
지구 밖으로 훌쩍
떨어져나가고 싶을 때가 있다
- 신경림 시 ‘그림‘
<길>, 창작과비평사, 1990
나는 늘 사진기를 들고 다닌다
보이는 것은 모두 찍어
내가 보기를 바라는 것도 찍히고 바라지 않는 것도 찍는다
현상해보면 늘 바라던 것만이 나와 있어 나는 안심한다
바라지 않던 것이 보인 것은 환시였다고
나는 너무 오랫동안 알지 못했다 내 사진기는
내가 바라는 것만을 찍어주는 고장난 사진기였음을
한동안 당황하고 주저하지만
그래도 그 사진기를 나는 버리지 못하고 들고 다닌다
고장난 사진기여서 오히려 안심하면서
- 신경림 시 ‘고장난 사진기‘
*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창작과비평사.1998
** 신경림(申庚林, 1935~ ): 시인. 1936년 충청북도 중원에서 태어나 1960년 동국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다. 이한직의 추천을 받아 1955~56년 〈문학예술〉에 시 〈낮달〉·〈갈대〉·〈석상〉 등이 발표되어 문단에 나왔다. 1973년에 펴낸 첫 시집 〈농무(農舞)〉의 발문에서 백낙청은 "민중의 사랑을 받을 수 있고 받아 마땅한 문학"이라는 점에서 이 시집의 의의가 있다고 했다. 이후 그는 우리 민족의 정서가 짙게 깔려 있는 농촌 현실을 기초로 하여 민중들과 공감대를 이루려는 시도를 꾸준히 하고 있다.
1998년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 이후 4년 만에 나온 신경림 시인의 시집. 『뿔』의 후기에서 시인은 “요즘 시가 한 그루 나무와 같다는 생각을 한다”며 “그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은 알지만 모르는 사람은 끝내 모르는 존재인 “나무를 심는 마음으로 시를 쓴다”고 썼다. 시인의 “한때 고통스럽던 시 쓰는 일이 이제는 즐거워졌다”는 말로 그의 시론과 창작이 원만한 합일에 도달했음을 보여준다.
1973년 만해문학상, 1981년 한국문학작가상을 받았다. 1992년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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