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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사는 이야기

봄에,, 목련이 피면.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 나희덕


우리 집에 놀러와. 목련 그늘이 좋아.
꽃 지기 전에 놀러와.
봄날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화하던 그에게
나는 끝내 놀러가지 못했다.

해 저문 겨울날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

나 왔어.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는 못 들은 척 나오지 않고
이봐. 어서 나와.
목련이 피려면 아직 멀었잖아.
짐짓 큰소리까지 치면서 문을 두드리면
조등弔燈 하나
꽃이 질 듯 꽃이 질 듯
흔들리고, 그 불빛 아래서
너무 늦게 놀러온 이들끼리 술잔을 기울이겠지
밤새 목련 지는 소리 듣고 있겠지.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
그가 너무 일찍 피워올린 목련 그늘 아래로.

[어두워 진다는 것],창작과비평사, 2001



목련, 정병근


빤스만 주렁주렁 널어놓고
흔적도 없네

담 너머 다 보인다
지나가는 사람들 다 본다
한 접도 넘고 두 접도 넘겠네

빨랫거리 내놓아라 할 땐
문 쳐닫고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겨우내 빤스만 사 모았나

저 미친 년, 白晝에
낯이 환해 어쩔거나
오살 맞은 년


- 『번개를 치다』(문학과지성사, 2005)




목련꽃 그늘 아래 [이근화]



이렇게 살 수 있겠니? 자취방에서 떡라면을 끓여
먹으며 물었지만 꼭 대답이 듣고 싶어서는 아니었
겠지. 방 안으로 햇살이 깊숙이 들어와 부끄럽게 빛
나고 있었고 창밖으로 기우뚱한 목련은 참 가난해
서 크고 하얀 꽃잎을 용감하게 매달았지.

그 봄은 다 셀 수가 있을 정도였어.

  소용없어, 목련이 웃었지. 그 웃음소리 참 맵고
아렸다. 나의 구멍을 목련 꽃잎으로 막는 봄이여.
호로비츠 같은 긴 손가락으로 오렌지색 三陽라면을
뜯고 몇 개의 굳은 떡을 넣어 휘휘 저었던 그는 봄
이 없는 곳으로 갔다. 내 마음에도 애써 발을 달아
주고 갔다.

   꿈쩍도 하지 않는 봄들을 매달아놓고.

    재개발로 제일 먼저 베어졌을 가난한 목련나무
는 내게 이주를 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봄마다 웃
는다. 그 웃음소리 참 맵고 아리다. 지겹고 맛있지
만 떡라면 같은 봄이 또 와서 가끔 재채기가 나고
갑작스러운 재채기 소리는 우습다.

  떡을 꼭꼭 씹어 삼키면 은은히 되살아나는 가난
이여.

    목련꽃 그늘은 커다란 입술이 되어 곧잘 대답을
하지만 그 소리가 들릴까. 바람이 달려가는 곳마다
온통 그의 귀가 매달려 있다. 큰 꽃잎이 뚝뚝 떯어
지며 괜찮다 말하지만 귀는 점점 검고 붉어진다.

나의 발을 삼키고 놓아주지 않는다.

   *나의 차가운 발을 덮어줘, 현대문학, 2022.





꽃을 그냥 보냈다 [정진혁]



꽃 저문 자리가 어두웠다
안이 잠기고 있었다
기다리지 않아도 봄은 끼니처럼 왔다 갔다

머리카락이 빠져나가고
당신이 빠져나가고

벚꽃이 지는 일이
손금을 들여다보는 일이고
누군가의 손을 놓으며 서로를 건너는 일이고
아프지 않겠다고 돌아서는 속사정이고
서로가 서로를 벗어나지 못하는 일인 줄도 모르고

찔레꽃 떨어지는 일에 한 시절이 깎이는 줄도 모르고
당신이라는 이름 하나가 희미해지는 줄도 모르고

꽃잎 하나 떨어지는 일이
모르는 곳으로 이사를 가고
동사무소에 가서 사망신고를 하고
당신의 바랜 뒷모습을 쳐다보는 일인지도 모르고
목련꽃 한 잎이 지는 일에 봄빛이 흐려지는 줄도 모르고

당신의 생김새를 열어 보고
당신의 등을 쓰다듬던 일이
분홍의 다른 이름이었음을 모르고

*사랑이고 이름이고 저녁인,파란, 2020.





목련나무 빨랫줄 [박서영]


누추한 속옷 내걸린 목련나무 빨랫줄
꽃이 어느 시간 속을 이동해 사라지는 것처럼
축축해진 옷을 입은 사람의 시간도 말라 간다
빨래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받아먹는
야생 고양이 한 마리의 시간도.

*착한 사람이 된다는 건 무섭다, 걷는사람, 2019




이런 꽃 [오태환]


순 허드레로 몸이 아픈 날

볕 바른 데마다
에돌다가
에돌다가
빈 그릇 부시듯 피는 꽃

  *복사꽃, 천지간의 우수리, 시로여는세상, 2013




나는 네가 [박상순]



나는 네가 시냇물을 보면서 화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시냇물이 흐르다가 여기까지 넘쳐도 화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목련 나무 앞에서 웃지 않았으면 좋겠다.
흰 목련 꽃잎들이 우르르 떨어져도 웃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밤 고양이를 만나도 겁먹지 않았으면 좋겠다.
밤 고양이가 네 발목을 물어도 그냥 그대로 서 있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꿈꾸지 않았으면 좋겠다. 창밖의 봄볕 때문에
잠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꿈에서 영롱한 바닷속을
헤엄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인공 딸기 향이 가득 든 고무지우개라면 좋겠다.
인공 딸기 향을 넣은 딱딱한 고무로 만든
그런 치마를 366일 입었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오래도록 우울하면 좋겠다.
아무도 치료할 수 없었으면 좋겠다.
그래도 나는 네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아무것도 아니라면 좋겠다.
이 세상에도 없었으면 좋겠다. 그 대신 너를 닮은
시냇물, 우르르 떨어지는 큰 꽃잎들,
달빛 아래 늘어진 길고 긴 밤 고양이의 그림자,
꿈속의 바다,. 그리고 고무지우개.
그런 것만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화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웃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어느 날 어느 순간 갑자기, 이 세상에 네가 없을 때에도
나는 끝까지 살아남아 네 모든 것에 어찌할 수 없도록 얽매인
불행이라면 좋겠다.

  *슬픈 감자 200그램, 난다, 2017.




봄 봄 [권지숙]


마른 봄바람에 먼지 뒤집어쓰고 짜증나
볼 부어 있던 목련 봉오리들
봄비 한나절 다녀간 뒤 금세 함박웃음 터져
벌어진 입 다물지 못하네
허리 흔들며
들뜬 웃음소리
뜰 안이 소란하네

*오래 들여다본다, 창비, 2010.




목련1 [최재영]



창가에 목련이 흔들린다
이쪽을 기웃거리다 나와 마주치자
슬며시 외면해 버리는,
그 파문에 나도 잠시 흔들렸던가
목련의 한 시절이 내게 물들어
모두 북쪽으로만 가고 있나니
내 발걸음도 자연스레 북(北)으로 향할밖에,
봄볕 몇 줌에도 꽃들의 좌우명은 바뀌나니
바람의 먼 기별에도
나는 자꾸만 눈물샘이 젖어들었으니
내 안의 그늘진 폐허도 한 번은 화들짝 피어날 것이니
나의 짧은 몇 걸음이
네게는 천 년을 견디는 일이어서
피고 지는 주어들도 한 계절을 걷는 일이어서
봄날을 건너가는 그의 잔잔하고 기인 호흡이
얼룩처럼 어룽지는 몇 날
목련 안쪽의 세상을 내 더 이상 알 수 없으나
떨어지는 날들도 한 생일 것이니
지금 막 눈을 맞추는 순간이
너와 나의 평생이다
이리 뜨거운,

*꽃피는 한 시절을 허구라고 하자, 시인동네, 2016.




백목련이 진다 [김선우]


이상하다, 계곡을 몰아쳐오는 눈보라
저 눈꽃떼를 어디서 만났던가
꽃으로 오기 전
네가 눈보라였다면 나는 무엇이었나
청명한 봄 한나절
돌연 단전 밑이 서늘해지고
내장을 따라 들어선 계곡에
꽃, 잎새도 없이 만개한 적멸보궁

얼음 녹아 아지랑이 흐르는데
왜 너는 그토록 서늘한 미소로 흔들리는지
네가 웃는 자리마다 조금씩 금이 가며
계곡의 뿌리가 시큰하다

독은 독으로 멸한다는데
동토를 녹인 건 열망의 독이었나
거꾸로 흐르는 눈보라의 꿈

사월 아침마다
목련꽃 져버릴까 두려웠더니
제 살 으깨며 번지는 석양 아래
눈보라여, 너는 자결을 준비했구나
뒤란에 나부끼던 무명 타래같이
새벽부터 곱게 몸단장 끝냈구나

꽃으로 오기 전 너는 무엇이었나
거꾸로 선 폭포였나 진흙탕 뒹굴던 놋반지였나
내 독은 아직 사타구니 뜨거운 희망이라서
절망을 멸하러 오는 절망의
맨 얼굴을 볼 수 없다 네 발목을 잡을 수 없다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창비, 2009.




목련 편지 [박후기]


몇 겹 어둠으로 덧칠해진 철문을 열면
보인다
알몸으로 떨고 있는
백목련 한 그루

봉긋이 부풀어오른 꽃봉우리가
가난에 찌든 구옥(舊屋)의 내막을 희미하게 밝히고,

어둠은 사월의 담벼락에 검은 천을 깔고
목필(木筆)은 달빛을 찍어
그 위에 편지를 쓴다

―아버지 위독하시다
  뿌리가 깊어 옮겨 갈 수도 없고
  무허가로 꽃 피운 죄밖에 없는데
  지는 것조차 마음대로 안 되는구나
  담장 밖 어둔 길 내다보며
  초조하게 피고 지는 어머니,
  재개발지구 목련꽃


*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갖고 있다], 실천문학사,  2007.




목련 분분(紛(紛) [오민석]



암 수술을 앞둔 친구와 한잔했다
마지막 술잔과
마지막 담배와
마지막 목련이 진 후
우리는 방화동, 춘자노래방에 갔다
인심 좋은 주인이 보너스 좀 주었으면 좋겠다

  *그리운 명륜 여인숙, 시인동네, 2015.




봄밤입니다 [안주철]


봄밤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디에서 출발했는지 모르지만
뜰에는 목련이 두그루입니다. 두그루밖에 되지않아도
뜰은 가득합니다.

목련은 봄밤에 몰래 꺼내 써야 합니다.
아내에게 걸리고
딸아이에게 걸리면
봄밤 중이라고 부끄러워하면서 말하겠습니다.

불행한 시를 오늘만은 쓰지 않고
오늘만은 쓸쓸함에 기대거나
슬픔에 만족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고양이 한마리가 울고 있습니다. 듣지 못하는 고양이는
제 울음소리를 한번도 듣지 못한 고양이는
쓰다듬어주어야 합니다.

귀를 잡아당겨서
자루처럼 길어질 때까지 잡아당겨서
고양이 울음소리를 담아주어야 합니다.

봄밤인가요? 봄밤입니다. 혼자 묻고 혼자 대답해도
봄밤입니다.

당신이 걷고 있는 길은 살아서 길길이 날뛰나요?
봄밤입니다.
        
  *다음 생에 할 일들, 창비시선, 2015




** 모련만 찍으러 출사를 나가던 때가 있었습니다. 목련의 기억은 중학교시절로 돌아 가는데,, 뒷집의 단란해 보였던 빨간 양옥집. 담 너머로 성숙하고 순결해 보였던 모란꽃, 백목련을 기억합니다. 보기에 참 아름답고 성숙하게 만개 했다가 어느날 아침 꽃잎을 모두 떨구고 져 버리는,,, 바닥에 떨어진 잎 수 많큼, 허무했던 아쉬움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 집의 단정했던 흰칼라의 수즙은 소녀의 모습처럼… 해 마다 4월이면 목련꽃을 기다리는 나를 봅니다. 봄이 시작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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