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경(初經)을 막 시작한 딸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 줄 수도 없다
생(生)이 끔찍해졌다
딸의 일기를 이젠 훔쳐볼 수도 없게 되었다
눈빛만 형형한 아프리카 기민들 사진,
'사랑의 빵을 나눕시다' 라는
포스터 밑에 전가족의 성금란을
표시해 놓은 아이의 방을 나와 나는
바깥을 거닌다, 바깥;
누군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 버리고 싶은 생;
뚱뚱한 가죽 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
글쎄, 슬픔처럼 쌍스런 것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 부대를 걸치고
등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 주면서
먼눈으로 술잔의
수위(水位)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폐인(廢人)을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황지우 시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것이다'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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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한 속을 달래려 산책을 하다가 편의점을 들러 사이다와 컵을 하나 사들고 흐리게 찌푸린 밖으로 나와 파라솔에 앉는다. 어제의 눈녹은 물로 인해서 거리는 알맞게 젖어 있는데,, 여전히 하늘은 무엇을 잔뜩 품은 듯 흐리고 어둡다. 프라스틱 컵에 사이다를 가득히 따른다. 무엇에 체증이 걸린 것일까?!,, 답답한 무엇을 넘기듯 차디찬 액체를 단숨에 넘기지만,, 체증은 쉽게 뚫리지 않는다.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많은 사람들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 때로, 우습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남의 눈을 의식하며 살아온 듯 싶다. 바보 같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찮은 것을 손에서 버리지 못하는 어린아이 처럼,, 우리는 우리 '손 안에' 든 것 만이 최고인듯, 최선의 것인 듯 '아둥바둥'하며 놓지 못하고 있다. 시인의 말처럼 '완전히 늙으면' 편안해 질까? 때로 버리지 못하는 내 미망이나, 집착을 어린시절의 악몽처럼 좀 처럼 떼어 버리지 못하는 나를 본다.
-우리가 바라는 기대나 소망은 때로는 '현실의 눈'에서는 베드로나 유다의 고백처럼 뼈 아픈 고백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앞에 놓인 '인생의 잔'에서 그것을 기꺼이, 기쁘게 마시기는 어려운 것이리라. 더구나 그것이 '예정된 것'이거나 거부할 수 없는 '독배'인 경우, 누가 인생에서 자유롭다 하며 강요하고 결정하는 순간을 기쁘게 받아 들이겠는가?!?,,, "'인간의 존엄'이란 무엇일까?" 하고 다시 생각한다. 도처에서 보이는 어려운 현실에서 타인의 손길에 끌리지 않고 '스스로' 나아가 끝 맺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의 모습을 보고 싶다. 약자의 모습과 강자의 모습 이란 진정 어떤 것일까,,,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 때로 '눈물겹게 비춰지는' 여러 모습에서 '가장'이나 '생활'이란 모습에서의 억척을 본다. 누가 누구를 욕할 수 있을까? 나 또한 그러한 모습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때로 그 상황을 외면 하고도 있으니,,, 양심 껏 산다는 것이 부끄럽다.
-20일, 큰 딸아이의 생일 날, 뺨에 "쪽"하고 입맞춤 해 주던 날. 흐린 하늘에 가늘게 눈이 내렸다. 고속도로를 타고 밀리는 차량 속에서 라이트를 켜면서,, 이 아이들이 사는 세상은 서로를 배려하는 따스함으로 가득하기를 기원했다. 이 아침,,, 또 다시 흰 눈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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