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도 외로워서
때로는
뒤걸음 질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오스텅스 블루'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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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덥다. 길가의 아스팔트는 아지랑이가 피어나듯이 눈앞에 이글거리고,, 희뿌옇게 맑지도 않은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땡볕이 아스팔트를 녹일듯이 뜨거움을 쏳아 붓는데,, 그 뜨거움으로 인해 길을 오래 걷다보면 현기증을 느낀다. 한낮에는 외출을 삼가고 아침, 저녁으로 선선할 때에 일을 보러 외출을 하는데,, 아침일찍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하지만,, 요즈음의 더위는 오전 10시만 지나도 숨을 탁탁막힐 정도로 무더우니,, 가히 '살인적인 더위'라 부를 만 하다. 까뮈의 '이방인' 에서인가 태양 때문에,, 더위가 주는 '뜨겁고 어지러운 환상'때문에 살인을 하는,, 뫼르소라는 남자. 평범한 직장인인 그는 양로원에서 외롭게 죽은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바로 다음날, 여자친구와 수영을 하고 코믹영화를 보고,, 희희낙락하며 여자친구와 함께 잠을 잔다. 그리고 며칠뒤 친구와 싸우고 있는 낯선이를 권총으로 쏘아 죽인다. 살인죄로 재판정에 서자, 왜 죽였냐는 재판관의 질문에,, "그것은 태양 때문이었다" 라고 답한다.
-"뜨거운 햇볕이 뺨을 달궈 땀방울이 눈썹에 맺히는 것을 나는 느꼈다. 그 햇볕의 뜨거움을 견디지 못하여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나는 그것이 어리석은 짓이며, 한걸음 몸을 옮겨 본댓자 태양으로 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모든것이 동요한 것은,,, 하늘은 활짝 열리며 불을 뿜는 듯 했다." 이 귀절을 읽으며 공감할 수 있음은 얼마전에 나역시 비슷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폭력을 싫어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비 이성적이라 이야기하던 나는,, 부끄럽게도 폭력적인 사람이였으니,, 아이의 교육문제로 이야기하다 결국에는 나 역시, 폭력을 행사했으니,, 그것이 단 한번이든,, 몇 번이든 '똑같은' 사람이니,,, 그 당시에 맞서던 마눌의 모습은,, 나를 참을 수 없게 했고,, 나자신도 심히 충격적이고 부끄러웠다. 온가족 앞에서 사과하고 속죄 했지만,, 마눌님은 1년간을 따로 살자고 이야기 했고,, 결국에는 나자신이 집을 나섰다. 104일 만에 장인, 장모의 나섬으로 집으로 돌아 왔지만,,, 그 104일이란 시간동안 내 자신을 들여다 보고 느낀것은,, "장담하며 살지 말자!"하는 깨닳음 이였다.
-이방인의 뫼르소는 "내가 외롭지 않다는 것을 느끼기 위하여,, 내가 사형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 뿐이다"라는 말로 이 소설의 끝을 맺는데,,, 논리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한 뫼르소의 행동을 통해 까뮈는 삶의 허무와 부조리를 말하고 있다. 관습에 의해 기계적으로 살아가는 일상생활 안에서 우리는, 그런 삶의 불가해함, 부조리함조차 느끼지 못하고 살아갈 때가 더 많지만,, 그러한 부조리의 인식이 인간이 인간다워질 수 있는 기본조건이라고 까뮈는 말하고 싶었던 듯 싶다. 수만권의 책을 읽고,, 아무리 많은 공부를 하여도,,, 실지로 깨닿고 행동으로 옮겨 살기에는 시간이 걸린다. 무덤덤하고 습관적인 삶 보다는 잠자는 의식을 깨우는 치열한 고통과 고뇌가 있는 삶이 더 났다는 말일지니,,, 평소에 '크산티페'라고 별칭을 붙여준 마눌님이, 부처님이나 예수님 처럼 거룩하게 보임은,, 내게 이러한 깨닳음을 줌이니,,, 언제까지라도 마눌님과 아이들은 내가 이세상을 떠날 때 까지,, 수없이 108배를 하며 땀을 흘리고 눈물을 흘려야 할 부처님이며 예수님이다.
-아아, 언제인가?!?....
맑게 발음(發音)하며
잔잔하게
세상을 바라볼 날은...
그날은
나의,
영원한 기원 이겠지,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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