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救)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愛憎)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보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灼熱)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永劫)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砂丘)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 유치환 시 ‘생명의 서‘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깍이는 대로
억 년 비정(非情)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 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은 바위가 되리라
- 유치환 시 ‘바위’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 유치환 시 ‘깃발’
동쪽 먼 심해선(深海線) 밖의
한 점 섬 울릉도(鬱陵島)로 갈거나.
금수(錦繡)로 굽이쳐 내리던
장백(長白)의 멧부리 방울 뛰어,
애달픈 국토(國土)의 막내
너의 호젓한 모습이 되었으리니,
창망(蒼茫)한 물굽이에
금시에 지워질 듯 근심스레 떠 있기에
동해(東海) 쪽빛 바람에
항시(恒時) 사념(思念)의 머리 곱게 씻기우고,
지나 새나 뭍으로 뭍으로만
향하는 그리운 마음에,
쉴 새 없이 출렁이는 풍랑(風浪) 따라
밀리어 오는 듯도 하건만
멀리 조국(朝國)의 사직(社稷)의
어지러운 소식이 들려 올 적마다
어린 마음 미칠 수 없음이
아아, 이렇게도 간절(懇切)함이여!
동쪽 먼 심해선 밖의
한 점 섬 울룽도로 갈거나.
- 유치환 시 ‘울룽도’
나의 가는 곳
어디나 백일(白日)이 없을소냐
머언 미개(未開)적 유풍(遺風)을 그대로
성신(星辰)과 더불어 잠자고
비와 바람을 더불어 근심하고
나의 생명과
생명에 속한 것을 열애(熱愛)하되
삼가 애련(愛憐)에 빠지지 않음은
그는 치욕(恥辱)임일레라.
나의 원수와
원수에게 아첨하는 자에겐
가장 옳은 증오(憎惡)를 예비하였나니
마지막 우러른 태양이
두 동공(瞳孔)에 해바라기처럼 박힌 채로
내 어느 불의(不意)에 짐승처럼 무찔리기로
오오, 나의 세상의 거룩한 일월(日月)에
또한 무슨 회한(悔恨)인들 남길소냐
- 유치환 시 ‘일월(日月)‘
(『문장』 3호, 1939.4)
해바라기 밭으로 가려오.
해바라기 밭 해바라기들 새에 서서
나도 해바라기가 되려오.
황금(黃金) 사자(獅子) 나룻
오만(傲慢)한 왕후(王候)의 몸매로
진종일 짝소리 없이
삼복(三伏)의 염천(炎天)을 노리고 서서
눈부시어 요요히 호접(胡蝶)도 못오는 백주(白晝)!
한 점 회의(懷疑)도 감상(感傷)도 용납지 않는
그 불령(不逞)스런 의지의 바다의 한 분신(分身)이 되려오.
해바라기 밭으로 가려오.
해바라기 밭으로 가서
해바라기가 되어 섰으려오.
- 유치환 시 ‘해바라기 밭으로 가려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는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머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 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 유치환 시 ‘행복’
물같이 푸른 朝夕(조석)이
밀려가고 밀려오는 거리에서
너는 좋은 이웃과
푸른 하늘과 꽃을 더불어 살아라
그 거리를 지키는 고독한 산정(山頂)을
나는 밤마다 호올로 걷고 있노니
운명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피할 수 있는 것을 피하지 않음이 운명이니라
- 유치환 시 ’너에게‘
[시읽기의 방법 / 유종호 지음 / 삶과꿈 ]
뉘 오는 이 없는 골에는
하늘이 항시 호수처럼 푸르러
적은 새 가지 옮으는 결에
송화가루 지고
외떨기 찔레
바윗돌 하나
기나긴 하루해 지키기 제우노니
참으로 마음속 그리운 이 있으면
이런 골짝 호올로 숨었기도 즐거워
고운 송화가루 송화가루
손에만 묻다
- 유치환 시 ‘그리우면’
오늘은 바람이 불고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일찌기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그 하늘 아래 거리 연마는
아무리 찾으려해도 없는 얼굴이여
바람센 오늘은 더욱더 그리워
진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나니
오오 너는 어드메 꽃같이 숨었느냐.
- 유치환 시 ‘그리움’
꽃등인양 창 앞에 한 그루 피어 오른
살구꽃 연분홍 그늘 가지 새로
적은 멧새 하나 찾아와 무심히 놀다 가나니
적막한 겨우내 들녘 끝 어디메서
작은 깃을 얽고 다리 오그리고 지나다가
이 보오얀 봄길을 찾아 문안하여 나왔느뇨
앉았다 떠난 아름다운 그 자리 가지에 여운 남아
뉘도 모를 한때를 아쉽게도 한들거리나니
꽃가지 그늘에서 그늘로 이어진 끝없이 적은 길이여
- 유치환 시 ‘春信(춘신)‘
뻗쳐 뻗쳐 아세아의 거대한 지벽(地벽) 알타이의 기맥(氣脈)이
드디어 나의 고향의 조그마한 고운 구릉에 닿았음과 같이
오늘 나의 핏대 속에 맥맥히 줄기 흐른
저 미개ㅅ적 종족의 울창한 성격을 깨닫노니
인어조(人語鳥) 우는 원시림의 안개 깊은 웅혼한 아침을 헤치고
털 깊은 나의 조상이 그 광막한 투쟁의 생활을 초창(草創)한 이래
패잔(敗殘)은 오직 죄악이었도다
내 오늘 인지(人智)의 축적한 문명의 어지러운 강구(康衢)에 서건대
오히려 미개인의 몽매(夢寐)와도 같은 발발한 생명의 몸부림이여
머리를 들어 우러르면 광명에 표묘(漂渺)한 수목 위엔 한 점 백
운내 절로 삶의 희열에 가만히 휘파람 불며
다음의 만만한 투지를 준비하여 섰나니
하여 어느때 회한 없는 나의 정한(精悍)한 피가
그 옛날 과감한 종족의 야성을 본받아서
시체로 엎드릴 나의 척토(尺土)를 새빨갛게 물들일지라도
오오 해바라기 같은 태양이여
나의 좋은 원수와 대지 위에 더 한층 강렬히 빛날진저 !
- 유치환 시 ‘생명의 서2’
깊은 깊은 회한이 아니언만
내 오오랜 슬픔을 성스러이 지녔노니
이는 나의 생애의 것이로다
오늘어 이르러 다시금 생각노니
그때 지은 哀別은
진실로 옳았노라 옳았노라
뉘는 사랑을 위하여 나라도 버린다더니
나는 한개 세상살이의 분별을 찾아
슬픔은 얻었으되 회한은 사지 않았노라
그날의 죽을 듯 안타깝던 별리를 생각하면
어느 하늘 아래 다시 한번
그대 안고 목놓아 鳴泣하료마는
그러므로 오오 나의 마음의 보배여 하늘이여
저 임종의 날에도 고이 간직하고 가리니
나의 생애는 그대의 애달픈 사모이었음을.
- 유치환 시 ‘사모’
꽃등인 양 창 앞에 한 그루 피어 오른
살구꽃 연분홍 그늘 가지 새로
작은 멧새 하나 찾아와 무심히 놀다 가나니.
적막한 겨우내 들녘 끝 어디메서
작은 깃을 얽고 다리 오그리고 지내다가
이 보오얀 봄길을 찾아 문안하여 나왔느뇨?
앉았다 떠난 아름다운 그 자리에 여운 남아
뉘도 모를 한때를 아쉽게도 한들거리나니,
꽃가지 그늘에서 그늘로 이어진 끝없이 작은 길이여.
- 유치환 시 ‘봄 소식’
가슴을 저미는 쓰라림에
너도 말없고 나도 말없고
마지막 이별을 견디던 그날 밤
옆 개울물에 무심히 빛나던 별 하나!
그 별 하나이
젊음도 가고 정열도 다 간 이제
뜻않이도 또렷이
또렷이 살아나―
세월은 흘러가도
머리칼은 희어가도
말끄러미 말끄러미
무덤가까지 따라올 그 별 하나!
- 유치환 시 ‘별’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 유치환 시 ‘그리움2’
진정 마음 외로운 날은
여기나 와서 기다리자
너 아닌 숱한 얼굴들이 드나는 유리문 밖으로
연보라빛 갯바람이 할일 없이 지나가고
노상 파아란 하늘만이 열려 있는데.
- 유치환 시 ‘우편국에서‘
다시 한 번 우러러 구름을 보소
인정의 고움을 가리워 구름은
노래인 양 저렇게 세상을 수(繡)놓았나니
그리우면 그리운 대로
책장처럼 넘어가는 푸른 조석(朝夕)인데도
그대 곰곰이 마음 지쳤을 때는
나의 꿈꾸고 두고 간 저 구름을
다시 한 번 조용히 우러러보소.
- 유치환 시 ‘구름‘
* <울릉도, 행문사, 1948>
** 柳致環(유 치환, 1908년 7월 14일 통영 출생~ 1967년 2월 13일 (향년 58세) 사망. 연희전문학교 중퇴. 1931년 문예월간 '정적' 등단. 1957.~ 한국시인협회 초대회장 .1947. 제1회 청년문학가협회 시인상.
유치환은 1908년 7월 14일 경남 거제에서 태어났다. 한의였던 유준수의 8남매 중 차남으로 형이 극작가 유치진이다. 통영보통학교 4학년을 마치고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야마(豊山)중학교에 입학했다. 형 유치진은 같은 학교 3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1923년 관동 대지진이 일어나 무고한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에게 무참히 학살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앗다. 아버지의 사업이 기울어 도요야마중학 4학년 때 귀국해 동래고보를 다녔으며, 이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들어가지만 중퇴하였다.
1934년 부산으로 거처를 옮긴 유치환은 본격적인 시작을 한다. <조선문단>에 ‘깃발’을 발표하면서 “이상향에 대한 향수와 좌절감에서 오는 비애감”을 표현하였다. 유치환은 ‘깃발’의 발표로 서정주와 함께 생명파 시인으로 불렸다. 1967년 2월 13일, 부산남여상(현 부산영상예술고등학교) 교장으로 있던 유치환은 학교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좌천동 앞길에서 시내버스에 치여 부산대학교 부속병원으로 옮겨지는 도중 세상을 떠났다. 저서에 <청마시초>, <유치환 시선> 등이 있다.
덧붙여)
“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럼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노라.”
- 유치환의 ‘행복’이란 시이다. 사정을 두지 않고 훅 들어온 사랑. 한 여인에 대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열병은, 시인에게는 주옥같은 시를 남기게 했다. 청마 유치환과 여류시인 정운 이영도의 이야기는 통영에서 피어났다. 통영여중 국어와 가사교사로 있던 두 사람은 한눈에 반했지만 자유로운 사랑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당시 유치환은 처자식이 있는 유부남의 몸이었고, 이영도는 21살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홀로 외동딸을 키우고 있는 미망인이었다. 9살 어린 과부를 좋아했던 시인 유치환은 그녀가 한눈에 들어오는 우체국 창가에 앉아 편지를 썼다. 유부남인 자신의 처지이기에 앞으로 관계를 더 나갈 수 없는 사랑이었기에 절제된 느낌의 글이었다. 1967년 유치환 시인이 부산에서 교통사고로 타계하자, 20여 년 동안 써 내려간 연서가 무려 5000여통 중 그간에 받은 연서의 일부 200통을 추려 <사랑했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라>라는 책을 출간했다. 서간집은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나,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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